오늘의 고마움
대학교를 졸업하고 한 10년 정도 내 헤어 스타일은 항상 커트 머리였다. 초반에는 커트를 한 상태에서 디지털 펌을 했었는데, 머리 모양이 마치 일본 캐릭터 아프로켄을 닮기도 했었고 당시 국내 최정상 남자 아이돌이었던 '샤이니'와 같은 느낌이 났던 것 같다. 아무튼 그 머리를 꽤 오랫동안 했었다. 그나마 그것도 20대였으니까 봐 줄만 했었는데, 30대 이후로는 귀여운 맛이 덜해져서 펌을 포기하고 줄곧 쇼트커트를 고수했다.
사실 처음 커트를 했을 때, 지인들이 긴 머리보다 훨씬 잘 어울린다고 하며 꽤 반응들이 좋았었고 나도 평범하지 않은 내 헤어 스타일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머리 감는 시간과 말리는 시간이 반으로 줄어들고, 관리도 편했다. 한 달에 한 번은 꼭 미용실에 가서 다듬어줘야 정돈된다는 것 외에는.
그런데 평생 고수할 것 같은 나의 쇼트커트 스타일도 점점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주변 언니들의 수많은 조언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내가, 드디어 머리를 다시 길러보기로 했다. 30대 중반이 넘어가는 이 시점에. 지금 아니면 또 언제 길러보나 하는 심정 + 약간의 이미지 변신을 노리기로. 그래서 지금 놀랍게도 6개월째 미용실에 안 가고 버팅기는 중. 커트에서 단발로 넘어오려는 중간에, 일명 '거지 존'이라고 불리는 그 구간에는 정말 참기가 어려웠지만... 나는 꾀를 내었다. 염색을 하기로.
쇼트커트를 오래 할 수 있었던 비결은, 중간중간 머리 색에 어느 정도 변화를 주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밝은 갈색, 그다음 갈색, 그다음 빨간색, 그다음 다시 밝은 갈색. 그런데 이 밝고 불그스름한 색마저도 어느 순간 지겨워졌다. 때마침 나의 거지 존 탈출을 위해 나는 염색을 한 번 더 선택한다. 바로 새까만 검은색으로.
설날 전, 단정하지 못한 머리 상태로 집에 가면 외모를 중시하는 우리 어머니께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을 것이 자명했으므로 나는 신속한 결단이 필요했다. 그래서 건대 입구에 있는 나의 단골 미용실(희정쌤 죄송해요!!)을 처음으로 제치고 선택한 것은 바로 동네 염색방. <태후 사랑>이라는 천연염색 전문점이었다. (광고 아님)
평소 동네 할머니나 아주머니들이 제 집 드나들듯 가시는 곳이라, 처음 들어가기 전에는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지만... 그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다정하게 맞아주시는 염색방 아주머니의 친절에 마음이 녹았다. "어서 오세요~ 아가씨 머리 하게?" "네... 검은색으로 염색되나요?" "아유~ 당연히 되지~ 근데 왜? 지금도 예쁜데." 그렇게 나는 의자에 몸을 맡긴 채 염색에 들어갔다.
염색을 하는 내내, 아주머니는 이곳에서 쓰는 염색약이 얼마나 좋은 성분인지, 전국 <태후 사랑> 점포의 실질적인 지주이신 대표님이 직접 개발한 약인데, 홈쇼핑에서도 완판이고 백화점에도 납품 의뢰를 받았으나 너무 유명해지면 희소가치가 떨어지고(?) 가격이 내려갈 것을 우려하여 제안을 거절하셨다는 전설적인 브랜드 스토리까지 줄줄 읊어주셨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 게, 정말 염색을 하는 내내 머리가 하나도 따갑지 않았다.
믿음이 가는 염색약 외에, 역시 이곳은 동네 염색방답게 나름의 진기한 풍경들이 있었다. 내가 들어가기 전부터 소파에 앉아서 열심히 보험 상품을 설명하시는 아주머니와, 그 아주머니의 남편 분과, 염색방 옆에서 음식점을 하시는 아주머니... 이렇게 세 분이 트리오를 이루어서 엄청난 잡담을 마치 화음처럼 하셨다. 심지어 염색방 아주머니는 내 머리를 해주시며, 남편 분의 영상 통화까지 받으시고 본인이 생일 선물로 받을 겨울 조끼까지 고르는 여유로움을 보여주셨다. (그 덕에 내 머리는 꼬챙이 빗으로 여러 번 찔리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염색을 하는 내내,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관없이 귀가 뚫려있다는 이유 만으로 그분들이 살아온 인생 스토리를 다 들어야 했지만, 이것이 동네 염색방의 묘미라면 묘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잠자코 내 머리를 맡기고 있었다. 이런 경험을 또 언제 할 수 있다고.
염색이 다 끝난 후, 아주머니는 여느 미용실들이 으레 그러는 것처럼 친히 관리법까지 알려주시고, 현란한 드라이 실력을 뽐내시며 멋있게 마무리를 하셨다. 새까만 머리로 변신! 20대로 다시 회춘한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기분 좋게 인사하고 2만 5천 원이라는 초초초 저렴한 염색 비를 내고 나왔다. 오랜만에 한 동네 사람의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해 주신 염색방 아주머니, 고맙습니다. 오늘의 감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