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쯤에서 그때의 내가 웃긴 건, 조림도 나름 하면 잘할 것 같지만, 그럼 차라리 구워 먹으면 되는 생선을, 귀요미 생각에 샀던 생선을 아이들은 매워서 먹지도 않을 조림을 해야 한다고 도대체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설마 우리 집 냥반 때문에?
여하튼 한 번 조림용이라는 낙인이 찍혀버린 우리 집 냉장고 젤 위칸에 터를 잡은 갈치는 조림을 해야만 하는 식재료가 되었다.
나는 현명한 주부이므로 시판 양념을 사서 비린맛이 전혀 없고, 간도 쪽쪽 잘 맞아 흰쌀밥에 올리면 밥이 뚝딱 사라지는 밥도둑으로 만들어야겠다 계획했다.
그럼 내일 대기업에서 심혈을 기울여 환상의 조합으로 만들어 놨을 양념을 사서 조리면 저녁 메뉴 해결이구나.
이제 점점 더 이 녀석은 구워서도 안 되고 내가 한 양념으로 조려서도 안 되는 그런 존재가 되어있었다.
아쉽게도 뒷날, 울 집 큰 귀요미가 먹고 싶다는 통에 초밥이 저녁 메뉴가 되었다. 근데 자꾸 냉장고 그 녀석이 맘에 걸린다. 이제 더는 지체하면 안 된다는 압박감에 뒷날,
가기 싫다는 꼬맹이 손을 잡고 마트로 향했다.
어, 예전에 분명 갈치조림 양념이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없었다.부대찌개, 마파두부, 강된장, 차돌 된장, 냉이 된장, 된장.. 된장... 된장들만 온갖 종류별로 있고 없다. 없어.
다담도 풀무원도 다 없다. 아들이 조용히 말했다.
“없네. 엄마, 그냥 가자.”
맞다. 냉장 코너 말고 거기 양념류 칸.
한 줄기 빛을 기대하며 종종걸음으로 간 새미네도 없다.
그날 저녁은 생선이고 뭐고 진이 빠져 피자로 대신했다.
이제 우리 집 냉장고 그 녀석은 두려운 존재로 바뀌었다.
혹여 살짝 상했으면 어쩌지. 내 키보다 높은 곳에 있는 탓에 더더욱 꺼내볼 엄두도 안 났다. 그냥 냉동실로 보내버릴걸.
아! 맞다! 바보 같이! 그냥 구울걸!!
그제야 다른 생각들이 났다.
한번 내 머리에 스쳤던 생각 외엔 다른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단 걸 알고 이건 뇌가 순수한 건지 융통성이 없는 건지.
한번 꽂혀버린 생각에 다른 방법을 떠올리지 못한
내가 너무 우스웠다.
이렇게 한번 스치듯 지나간 생각이나 장면, 모습으로 얼마나 많은 고정관념을 가지고 살았을까.
아예 박혀버린 생각으로 다른 모습이나 방법들을 보지 못한 것이 정말 많았겠구나.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면 왜 다른 것들은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을까.
어릴 땐 어려서 그렇다 핑계라도 하겠지만 이젠 어른인데.
경험치가 쌓일수록 오히려 더 많은 편견과 고정관념을 가져버린 건 아닌지.
꺼내보니 그대로인 갈치의 반들반들 빛나는 은빛에 내 얼굴이 비치는 것 같았다.
나쁜 줄 알면서 버리지 못하는 습관,
필요도 없고 쓰지도 못할 것에 대한 욕심,
잘못된 선택임을 알면서도 멈출 줄 모르는 우유부단함,
그럼에도 선택했으면 책임져야지 미룰 때까지 미루는 미련함. 이 모든 것이 다 비쳐 보이는 것 같았다.
뒷날 진짜 동네마트에 갔더니
예상외로 대기업에서 운영 마트보다 더 많은 종류의 양념장이 있었다. 그것도 정확히 ‘갈치조림양념!!'
너, 참 반갑다.
그날 저녁메뉴는 정말 갈치조림이었다.
무 착착 썰어 냄비 젤 밑바닥에 깔아 갈치를 놓고 그 위에 양파를 숭덩숭덩 썰어 빨간 양념을 맨들한 얼굴 같은 은빛 갈치 위에 뿌렸다. 보글보글 끓어오르자 다진 마늘 크게 한술, 파릇파릇 채 썬 파를 덮어 더 기다렸다. 와우!! 이건 뭐 식당에서 파는 것보다 더 나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