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상이 시가 되는구나 용기가 생겼다.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불현듯, 나는 시를 쓸 수 있겠구나 싶었다.
구구절절하다 보면 이상하게 작아지는 내가 느껴져 마음이 땅바닥까지 꺼져 버리고 결국엔 모든 것이 짜증스러워져 버리는 통에 나에게도 누구에게도 불친절한 상황이 되어버린다.
어떤 땐 나의 친절은 나를 쪼그라들게 만들기도 한다.
시는 그렇지 않다 싶었다.
짧은 한마디로도 혹여 조금은 길어져도 구차해지지 않는. 시의 언어는 너무 근사하다.
때로는 나도 놀랄만한 표현을 찾아냈을 때는 너무 좋아서 보고 보고 또 보고 눈에 담아놓는다.
시를 고등학교 수업시간 이외에 배운 적은 없지만 그냥 시를 써야겠다 했다.
그런 생각이 찾아왔을 즈음, 고명재 시인의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를 만났다.
나를 보고 ‘언니가 너무 좋아!’라고 말을 해준 조용하고 따스한 사람이, 글을 보면 마음이 가는 사람이,
이 책이 너무 좋다고 하는 말에 일단 사두었는데 이제야 열어보았다. 시인이 썼다는 산문은 시였다.
산문이라는데 온통 시였다.
시인의 글을 읽다가 감탄했다가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다.
마음을 둔 것에 나도 모르게 어느새 닮아 가버리는 나는 모든 말을, 생각을 시처럼 하고 있었다.
어릴 적 제목도 기억나진 않지만 소설에 빠져있던 때가 기억난다. 등교를 하던 버스 안에서도 ‘그 애는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라든가 생각들을 소설의 문장처럼 속으로 말하던 유치했던 내가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났다.
꼭 그때처럼 며칠 동안 나의 일상은 시가 되어 있었다.
저녁을 먹은 식탁에 앉아 책을 펼쳤다.
정말 지극히 일상적인, 감성이라고는 1도 없는 식탁에서 갑자기 눈물이 났다.
시인의 말이 아려서, 아린 말속에 나의 지난 시간이 어려서, 어릿어릿 떠오른 시간에 어린 시절의 나와 모든 것이 떠올라서, 떠오른 그때의 어린 나와 지금 내 옆의 어린 나의 아이들이 겹쳐서, 모든 것이 뒤범벅되고 가슴에 휘감겨 눈까지 뻑뻑하게 차올랐다.
유난히도 세심한, 나의 감성을 똑 닮은 아들은 나를 본다.
혼자 학습지를 하며 꼬물고물거리고 있었는데 나의 미세한 떨림을 알아챈 것이다.
“엄마, 울어?”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깨어난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모른 채 바라보았다.
“괜찮아 엄마, 감동한 거야?” 들켜버린 맘이 쑥스러워 고개를 끄덕였다.
“나 신경 쓰지 말고 책 봐. 계속 봐. 괜찮아.” 하며 나의 등을 쓸어준다.
우리 집 식탁은 늘 잔소리가 난무하거나, 까르르 깔깔 시끄럽거나, 시무룩하거나, 냠냠 씹어 삼기는 소리가 있던 공간. 그 공간이 시가 되는 순간이었다.
나 신경 쓰지 마라고 하던 아이는 말과는 다르게 온갖 신경을 나에게 쏟으며 내 손을 쓰다듬거나 나를 자꾸 흘끔거렸다. 엄마 괜찮아. 울어도 괜찮아. 하던 유치원생인 아들은 작고 포동포동한 손으로 어느새 휴지를 뽑아 내 눈을 꾹꾹 눌러주었다.
순간 엉엉 울어버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옆에서 이미 이 상황을 온갖 우스꽝스러운 몸동작으로 놀리듯 장난치는 남편과 딸아이의 모습이 민망해지고 더 웃겨질 것 같아 꾹 참았다.
아구아구 내 새끼들.. 그 옆에 하나 빼고.
나는 시를 써야겠다 생각했다.
고매한 무언가가 있어야 되는 건가 깊게 생각지도 않았었는데 시를 쓸 수 있겠다 생각되었다.
이런 것이, 나의 저녁 일상이, 통통한 아이의 손이, 까불까불 흔들던 남편과 아이의 몸동작이, 아릿아릿하던 나의 마음이 시가 되는구나 싶었다. 형식 따위, 별 중요하지 않다 불쑥 용기가 생겼다.
꽤 많아져버린 나이 때문인 건지, 유난히 겁이 많았던 내가 의지를 가져버린 중년이 되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이제 그런 눈치나 틀이나 모든 것을 염려하기엔 나의 하루가 너무 소중함을 알아버린지라.
이런 나의 마음을, 용기를 시라고 해도, 시처럼 아름답게 여겨도 되겠다 싶다. 나는 시를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