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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문득 생각

그냥 그렇게,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내게도 생길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by 축복이야


‘놀라지 말고 들어라.’

잔뜩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엄마의 한마디에 큰일이 생겼구나 알 수 있었다. 아빠는 직장암 3기였다.

생각보다 빨리 병원에 예약이 되고 치료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모든 과정이 그리 쉽지 않았다.


한 달이 더 지나자 부모님도 가족들도,

아빠를 위해서 라면으로 시작된 나의 마음도 흐려지기 시작하고 몸도 마음도 힘들었다. 그래도 끝은 있었다.

그 힘든 시간도 결국 지나고 수술 경과도 좋았다.

모든 것이 그렇게 순조롭고 잘 진행되고 이제 회복만 남았다고 생각하던 그때, 생각지도 않은 변수가 생겼다. 코로나에 걸리신 거였다.

아빠는 점점 상태가 나빠졌고 결국 거동조차 못하게 되셔서 그 시간들은 물거품이 되었다. 늘 불같은 성격의 아빠 때문에 엄마는 참 많이 힘들어하셨다. 자기밖에 모르는 아빠 때문에 울기도 많이 하셨다. 그런 엄마가 아빠를 요양병원으로 모시자고 했을 때 반대하시며 많이 우셨다.

거기가 꼭 세상의 마지막인 것처럼.

이렇게 우리의 남은 시간은 지나겠구나 했다.

이 시간의 끝이 무엇일까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더 긴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매주 엄마가 아빠를 만나고 오는 날은 나에게 전화를 하셨다. 아빠에 대한 얘기로 시작해서 아빠를 모시고 나온 간호사가 어땠는 지로 갑자기 이야기가 바뀌었다가 거기 매점에서 산 기저귀가 어땠는지까지 두서없는 이야기를 계속하셨다. 혼자 계신 엄마가 얼마나 대화가 하고 싶으셨을까?

그래 엄마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그나마 엄마의 외로움과 답답함을 풀어드리는 일이지 싶다가도 끝도 없는 얘기에 힘들어 말을 싹둑 자르고는, 그래서 아빠가 괜찮았다는 거지? 고생했어요.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면 그거 하나 참고 들어드리지 못한 자책감에 한동안은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래 놓고는 엄마가 잘 챙겨는 드시나 싶어 먹거리를 골라 보내드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다.


내가 어렸을 적 아빠가 정성을 기울이던 화단에 하루는 예쁜 곳이 펴있기에 물었다. 수국이라고 했다.

탐스러운 보랏빛의 수국이 참 예쁘고 신비롭게 느껴졌다. 혼자 불암산을 걷다 수국이 만발한 정원을 만났다. 아름다움에 빠져 멍하니 보다 갑자기, 아빠가 떠올랐다.

젊은 아빠의 예쁜 정원과 그 속에 어린 나.

그 순간 전화가 울렸고 엄마는 놀라운 이야기를 전했다.

수술 후 거의 10개월을 누워 계시던 아빠가, 식사도 혼자 못하시던 아빠가 걸으신다고!!

정말 이런 건 소설이나 영화에만 있는 이야기 아닌가? 그리고 내가 아빠를 생각하고 있던 이 타이밍에?

이런 걸 기적이라고 하나 싶었다.


그리고 몇 주 뒤 아빠는 다시 집으로 오셨다.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화면 속에는 예전의 모습처럼 아빠가, 엄마가, 환히 웃고 계셨다.

그냥 손녀 손주가 보고 싶어 전화하던 그 어느 날처럼,

바짝 짧은 아빠의 흰 머리카락 빼고는 똑같았다.

불같고 자기밖에 모르던 아빠가 요양병원에서 섬망증상이 있던 그때에도 꼭 하던 말이 있었다.

‘엄마가 힘드니까 엄마한테 잘해. 느그엄마 불쌍해.’ 평소에는 들어보지 못하던 말들이었다.

엄마는 아빠가 달라졌다고 했다.

지난 기억이 다 온전하신 건 아니지만 병원에 있었던

시간들로 인해 변하신 듯하다.


각각 방식은 다르지만 서로에게 마음이 닿을 수 있게 노력하게 되는 것이 사랑이 아닐까 한다.

자상함은 지금 아빠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사랑 표현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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