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경험한 아픈 과거와 직면하는 시간은 여전히 괴롭고 힘들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다. 용기 한 모금 마시고 써 내려가 보기로 했다.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병원에서의 충격적인 상황을 기억에서 지우고 싶다. 휴대전화 노트에 짧게 기록했던 2019년 병원일지는 노트북 한글 파일과 USB에 저장되어 있지만, 지금도 열어보지 못한다. 에휴~. 난 아직도 겁쟁인가보다. 조금 더 강심장이 되면 언젠간 열어볼 수 있는 날이 오겠지.
딸이 루푸스 진단받은 지 11년이 되었다. 루푸스는 면역계의 이상으로 온몸에 염증이 생기는 만성 자가면역질환이며 류마티스내과에서 진료한다. 전신성 홍반성 루푸스 또는 전신성 홍반성 낭창이라고도 한다. 처음 진단받을 당시 루푸스라는 단어가 생소해서 교수님께 여쭤봤다. 루푸스가 뭐죠? 무슨 병인가요? 희귀 난치성질환이라고 말씀하시는 순간 희귀 난치라는 말에 앞이 깜깜했다.
루푸스는 자가면역질환
우리 몸은 염증이나 세균, 바이러스와 싸우는 항체를 만든다. 정상적인 항체라면 자기를 공격하지 않지만, 염증이나 세균, 바이러스가 아닌 스스로 자기 몸을 공격하는 항체가 있다. 바로 자가항체(Autoantibody)다. 자가면역질환은 자가항체가 자신의 몸(세포)을 공격하는 질환을 말한다. 루푸스는 몸 전신 모든 세포가 공격 대상이라고 한다.
루푸스 진단받기 전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전조증상이 있다. 전조증상이나 초기증상은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을 것이다. 딸은 진단받기 약 2~3년 전부터 루푸스가 자신을 봐 달라며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지만,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딸이 경험한 루푸스 초기증상들이다
1. 2010년 초 아킬레스건이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염증이란다. 아무런 사고도 없이 갑자기 통증이 느껴졌다. 절뚝거리며 건물 난간을 잡거나 벽에 의지한 채 걸어 다녀야 했다.
2.위경련 같은 증상이 잦았다. 청소년 시기에 스트레스로 인한 위경련을 달고 살아서 단순히 위염과 위경련이겠지 했다.
3. 피로감은 대다수 루푸스 환우님이 겪는 증상으로 알고 있다. 평소보다 몇 배로 크게 느껴지는 피로감이 지속되었다. 아침에 잘 들리던 알람을 듣지 못하는 횟수가 늘어갔다.
4.생선회를먹고 온몸에 뾰루지처럼 피부발진이 올라왔는데 평범한 두드러기보다 더 빨갛고 뾰족한 모양을 한 피부 발진이다. 현재는 회는 절대 먹지 않는다. 딸이 무척 좋아했던 음식이고 여전히 좋아하지만, 루푸스는 세균과 바이러스에 취약한 점을 고려해 날고기나 날생선은 먹지 않는다. 꼭 익혀 먹어야 한다.
5. 신경계의 문제였는지 평소 우울감과는 다르게 심한 우울증을 겪다 보면 극단적 충동이 느껴질 때가 종종 있었다.
본격적으로 증세가 나빠지기 시작한 시기는 2012년 여름
본격적으로 증세가 나빠지기 시작한 시기는 2012년 여름. 복통 때문에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해서 살이 빠지기 시작했다. 집 근처 내과 병원에서 복부 엑스레이와 초음파 검사를 했다. 사진과 초음파 영상에는 시커먼 것들이 빵빵한 풍선처럼 복부를 채우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은 정체불명 알 수 없는 빵빵한 것은 변비로 가스가 찬 것이니 너무 염려 말라고 하신다. 가...가스라니. 딸은 어안이 벙벙했다. 어려서 변비로 고생한 일이 많아서 변비가 어떤 느낌인지 잘 안다. 하지만, 변비라고 말하기에는 통증이 엄청나다. 우리는 물음표를 남기고 병원을 나왔다. 큰 병이 아니라는 사실에 마음을 놓았지만, 다른 병원을 찾아 검사를 다시 받아봤어야 했다.
한 달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까맣게 모르고 평소처럼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루푸스는 자기 좀 봐 달라고 계속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딸은 신호를 예측하지 못한 채 9월 어느 날 복부에 심각한 통증과 설사를 동반한초록색 담즙(쓸개즙)을 토하기 시작했다. 온몸은 식은땀으로 척척하게 젖었다. 심각한 통증으로 똑바로 일어설 수 없었고, 몸을 구부려 팔과 다리에 의지 한 채 기어서 화장실을 오갔다. 딸아이 친구는 딸이 응급실에 가야 할 것 같다며 나에게 전화를 했다. 당황한 나는 바로 딸에게 달려갔고, 딸은 이미 응급실 침대에 누워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