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푸스 진단 후 일 년 동안은 응급실과 병실이 내 집이려니 했다. 병원 생활이 고달프긴 했지만, 환자를 아끼는 마음이 진심이었던 딸아이 담당 교수님 덕분에 딸은 웃음을 잃지 않고 입원 생활에 적응해 갔다. 입원 중 딸이 가장 행복하게 웃었던 시간은 주간 식단표가 적힌 F4 용지 한 장이다. 나는 그때 알았다. 종이 한 장에 적힌 식단표 하나에도 이렇게 행복하게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맛있는 음식을 먹는 시간은 장소가 어디든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도 딸을 보며 깨닫는다. 모자란 엄마는 이렇게 또 성장한다.
2013년 11월 딸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그날은 신장 조직 검사하는 날이다. 딸은 신염(신장염)으로 단백뇨가 심한 상태였고 조직검사를 피해 갈 수 없다고 했다. 딸은 조금 긴장한 듯 보였지만 웃으며 시술실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시술 시간이 길었지만, 시술이 끝나고 딸이 누워있는 침대가 복도로 나오고 있다. 병원 복도에서 애타게 기다리던 나는 무사히 나와준 딸을 보고 그제야 웃을 수 있었다. 그런데 딸이 누워있는 침대 양쪽을 에워싸고 있는 의료진 표정이 심상치 않다. 딸은 눈을 뜨지 못하고 속이 메스껍고 토할 것 같다며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맥박은 약하고 입술과 얼굴, 손은 온통 흰빛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의료진은 쇼크라고 했다. 혈압을 체크하려고 했으나 맥박이 잡히지 않아 결국 실패하고 만다. 당황한 의료진은 몹시 바쁘게 움직인다. 다시 혈압 체크를 시도했는데 최고 혈압이 ‘90’이다. 저혈압으로 인한 쇼크? 도대체 왜 딸이 쇼크가 온 거냐고 물었다. 저혈압 쇼크나 시술한 부위에서 출혈이 있을 때 쇼크가 올 수 있지만, 딸이 긴장을 많이 한 것 같다고 한다. “자면 안 돼! ㅇㅇ아 잠들지 마!” 정신을 놓아버린 딸을 계속 부르며 깨웠다. 순간 무섭고 두려웠다. 몇 분이 지났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딸은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서서히 안정을 찾아갔다. 신장내과 교수님은 놀란 마음을 쓸어내리듯 가볍게 웃으며 딸에게 한마디 하신다.
“ㅇㅇ이는 사람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어?”
짧은 시간이었지만, 불빛이 보이지 않는 동굴에 몇 시간 동안 갇힌 듯 막막했던 2013년 11월 그날이 지금도 또렷하게 살아있다.
병실로 돌아온 딸은 자신이 왜 쇼크가 왔는지 이유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쇼크 원인은 시술실에서 시작되었다. 조직검사는 신장내과 교수님이 직접 시술하지 않았다. 교수님은 시술 전 병실에 오셔서 직접 시술하신다고 말씀하시며, 지혈의 중요성을 강조하시고 전반적인 주의 사항을 유쾌하게 설명하셨다. 정작 시술실에서는 누군가에게 지시만 하셨다고 한다.
“왼쪽, 오른쪽, 아니 아니 살짝 빼! 조금만 뒤로, 살짝 빼서 다시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아니 아니 그게 아니지 뒤로...”
직접 시술한 사람이 전문의(?) 아니면 레지던트(?)인지 알 수 없었으나 피부를 뚫고 들어온 날카로운 도구가 몸 안에서 헤매고 있는 손길이 생생하게 느껴졌다고 했다. 긴장하지 않으려고 스스로 마음을 부여잡고 있었는데 “아니 아니 그게 아니지 다시 뒤로” 누군가에게 설명하시는 교수님 말씀에 갑자기 갈팡질팡하며 허둥대는 손길에서 딸은 극도의 공포감이 밀려왔다. 루푸스 치료 이후 지혈이 잘되지 않는 이유로 딸은 긴장감이 절정에 도달했고, 결국 매스껍고 울렁거림으로 끙끙 앓기까지 했단다.
딸이 루푸스 진단 초기 입원했을 당시 배를 움켜잡고 통증을 참아내며 웃는 얼굴을 보이자 회진 오신 교수님은 “ㅇㅇ이 같은 환자 처음 본다야.” 하시며 독한 통증을 참아내는 딸을 기특해하셨다. 이런 딸이 끙끙 앓았다는 것은 몹시 괴로웠던 모양이다. 딸을 향해 의료진은 금방 끝난다며 조금만 참으라고 했다. 그 뒤로도 신장 조직을 떼기 위한 바늘의 사투는 몇 차례 계속되었다. 마침내 시술은 끝났지만, 딸은 스스로 몸을 가누기 힘든 상태가 되었다. 정신을 부여잡으려 노력했으나, 조금씩 정신이 흐려지기 시작했고 쇼크로 이어졌다.
쇼크 사건으로 딸이 시술에 투입되는 의료진에게 바라는 마음이 있다고 한다.
환자라면 누구나 능숙하게 치료받고 시술받는 상황을 선호한다. 레지던트나 전문의 과정에는 새롭게 접하는 치료나 시술이 많을 테고 경험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이해한다. 하지만, 환자의 상태나 성향, 기질에 대해 미리 파악하고 시술에 투입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성향이 예민하고 섬세해서 긴장을 잘하는 환자의 경우 시술 중 갑작스러운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고 본다. 딸이 경험한 예상치 못한 쇼크가 일어난 것처럼.
수많은 환자를 치료해야 하는 의료진은 어떻게 환자 성향까지 파악할 수 있냐고 항변할 수도 있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만일 의료진 가족이 딸과 똑같은 상황에 놓여있고, 쇼크로 인한 의료사고가 발생했다면 어떤 마음일까? 병원이라는 척박한 환경에서 의사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고단한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으나, 조금은 알고 있다. 하지만, 생명은 둘이 아닌 오직 한 개뿐이기에 부탁하는 것이다. 한 번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고심해서 결정해 주기를 진심으로 딸은 바란다.
만일 누군가 딸과 같은 상황을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 지금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고 메스꺼워 죽을 만큼 힘들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반드시 의사에게 요구해야 한다. 위급하다고 판단된다면 망설이지 말고 당당히 “제발 도와주세요”라고 요구해야 의료사고를 막을 수 있다.
안 보면 모를 수 있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 딸과 나는 괴롭지만, 누군가는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글을 올리게 되었다. 오늘 내용에 담긴 쇼크 사건은 딸이 상처를 받았던 사건은 아니다. 고통이 되어 버린 소수 경험에 비하면 그나마 양호한 편이다. 단지 위급한 상황에 놓일 수 있는 과정을 누군가는 겪지 않았으면 해서 밝힌 내용이다. 딸이 병원에서 경험한 소수 일을 토대로 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 없게 각인된 상처는 다음 기회에 발행할 생각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환자의 고충을 알아주고 진심으로 치료해 준 의료진이 더 많았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지금도 그분들 얼굴을 떠올리면 달려가서 진심으로 고마웠다고 몇 번이고 전하고 싶다. 그분들은 딸과 우리 가족에게 잊을 수 없는 참된 의인으로 남아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그분들만 생각하면 심장에서 뭉클한 것이 올라온다.
환자에게 진심인 의료진에게 전하고 싶다.
오늘도 몸을 아끼지 않고 희생하고 계실 당신들의 노고에 머리 숙여 감사함을 전합니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