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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복 Jun 02. 2016

# 한 번 살기

예전에는 무거운 주제로 글을 쓰는 것을 주저했다.

아픈 건 덮어두고 좋았던 일을 적는 것이 왠지 더 세상을 잘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으니깐... 그렇지만 언제부턴가 쓰는 일에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나를 고스란히 꺼내 놓듯이 무언가 적고 있는 나를 본다.

살아가는 일에는 기쁜 일만 있는 것이 아니며, 나만 이 세상에서 선택받은 듯이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이 교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하나, 둘 마음으로부터 떼어 놓듯이 조각조각 무언가를 쓴다. 먼저 적은 글이 있어서 적지 않을까 하다가 마저 적어보기로 했다.                            


남편의 동생(도련님)이 지난주 직장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모든 이들의 바람을 담은 기도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수술이 잘 됐다는 의사의 소견에도 불구하고, 몸은 좋아지지 않으셨다. 다시, 다시.. 그렇게 세 번의 수술이 진행되었다. 몸을 살리겠다고 한 수술이 오히려 살지 못하도록 한 것처럼 점점 힘을 잃어가셨다. 나의 소원은 눈앞에 모습들로 바뀌어 버렸다. 도련님을 위한 기도는 "살게 해주세요"이기도 했지만, "중환자실에서 나올 수 있도록 긍휼함을 베풀어 주세요"였다.  

일반실로 옮기셨다고 했다. 얼마나 좋았는지.. 그 다음날 병원을 찾아갔다. 일반실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온 몸에 일그러진 고통이 느껴져서 눈물만 흘리다가 나왔다. 그리고 저녁.. 다시 중환자실로 방향은 틀어져 버렸다. 가지 않길 원했던 방향으로 침대가 병원 복도를 유유히 미끄러져 지나갈 때, 무언의 희망 없음이 지나가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중환자실 면회를 기다렸다. 30분 면회 시간이 주어졌다. 부산에서 다시 화성 집으로 돌아와야 하기에 꼭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처럼 이른 아침 중환자실 문밖에 다른 가족들도 고요하게 서있었다. 한 명씩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중환자실의 자동문 열고 닫히는 소리만 크게 들렸다.

나의 차례다.  중환자실에는 여섯 명 정도의 환자들이 있었다.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한 곳을 향해 걸어가는데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만 같았다. 온몸에 달려있는 복잡한 호스가 거친 숨소리와 함께 들썩거렸다. 숨을 쉬는 것이 가장 쉽다고 생각했던 마음들이 도련님 앞에서 허물어져 버렸다. 

중환자실 면회는 한 사람씩 들어가야 한다고 해서 형님과 남편이 들어갔다 나오시고 내게 주어진 시간은 약 5분 이었다. 그 5분이란 시간은 도련님과 가족으로 만난 시간 중에서 일대일로 대면한 모든 시간 중에 너무도 적지만 셀 수 있는 시간 중 하나였다. 다음 만남을 예측할 수 없는 마음으로 사람을 바라보기가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주저하다가 후회가 남을 것 같아 도련님 손을 꼭 잡고 얘기를 나눴다.

"저희 이사한 집에 꼭 오셔야 돼요.. 다시 보는 거예요 아셨죠"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해도 눈물샘이 고장이 난 것처럼 자꾸만 흘러내렸다. 나는 왜 얼굴도 많이 보지 못했던 도련님 앞에서 이렇게 온 마음이 아픈 걸까 생각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남겨진 아들로서 살아야 했던 측은함과 사람에 삶에 대한 연민이 마음속에서부터 복받쳐 올랐다. 울고 있는 내게 무어라 손짓을 하시며 얘기를 하시는데 그 소리가 너무 작아서 들을 수가 없었다. 주어진 면회시간이 끝나고 나가는 발걸음에 만감이 교차했다. 이것이 마지막이라면 어떡하지...

그로부터 2주 뒤.. 그 시간을 끝으로 다시는 도련님을 볼 수 없게 됐다.



돌아가시는 날 아침 그 날은 다른 날보다 잠이 일찍 깼다. 그 날은 우리 부부의 8주년 결혼기념일이기도 했다. 그렇다 해도 갑자기 부산에서 전화가 올 지 몰라 잠잠히 있던 날들이었다.

그리고.. 남편이 아침을 먹고 출근하려던 참에 전화가 울릴 시간이 아닌데 울렸다. 순간 "쿵"한 채 나는 그대로 멈춰버렸다. "제발 아니기를..." 남편은 전화를 들고 "네.."한 마디를 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방으로 들어가는 남편을 따라 들어가니 등을 보이고 울고 있었다. 마치 아이처럼.. 마음이 텅텅 빈 듯이 헛헛한 소리가 그에게서 나왔다. 남편의 눈물은 내가 봤던 처음 눈물이었다. 그동안 마음을 준비한다고 했지만 준비된 마음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처음 도련님을 본 날은 8년 전 결혼식장 가족사진을 찍을 때였다. 전에 인사드리러 갔을 때마다 일을 하셔서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투박하고 무뚝뚝하셨지만 수줍음이 많으셨다. 도련님을 처음 보던 8년 전 그 날이 8년 후 마지막 만남이 되던 날이 되었다.

 

화장을 한다고 했다. 화장장에 들어섰을 때 상복을 입은 많은 사람들이 시선에 들어왔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비슷한 시간에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 내가 서있는 앞으로 쉴 새 없이 관이 지나갔다. 그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의 구슬픈 눈물을 보다가 목 끝이 얼얼하고 이내 나의 눈동자도 뿌해져 버렸다.

화장장 내부에 생소한 풍경에도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모니터 화면에는 열두명 고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화장 중, 수골 대기, 1차 수골 완료"그런 단어가 적혀 있었다.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만든 것이라지만 마음이 서늘했다.

로비에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그 날 화장을 하려는 사람들의 사진이 칸막이마다 놓여 있었다. 그리고 모니터에는 목관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 주었고, 한 시간 삼십 분이 지나고 나서는 유해가 마치 군데군데 쌓여있는 모래처럼 흩어져 있었고, 그 곁에 한 분이 정중하고도 느린 몸짓으로 유골들을 쓸어 담고 있었다. 저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구나..

조그마한 나무 상자를 안고 걸어가는 남편의 뒷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동생을 작은 상자에 담아 마지막을 배웅할 줄 누가 알았을까? 남편보다 몸집이 큰 동생은 한 품도 안 되는 작은 상자에 담겨 버렸다.  납골은 하지 않고  뿌리는 걸로 해서 그 유해를  화장장 안에 유해를 뿌리는 유리 단지 안에 부어버리자 그 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집에 돌아왔지만 처음으로 그 모든 것들을 가까이 봐서인지 눈앞에 자꾸만 어른거렸다. 결혼식장에서 처음 봤을 때, 그 사이 봤던 모습, 그리고 화장으로 사라져 버리는 모습까지..

하나하나 떠오르는 기억들을 안 하려고 하는 것보다, 이 안에서 내 안에 흡수되는 삶을 향한 모습들이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도련님과 같이 팀을 이뤄 일을 하셨던 분들이 조문을 오셨었다. 너무도 애처롭게 영정사진을 바라보시면 눈을 떼지 못하시는 분, 건축일을 하셔서 인지 검게 그을린 모습으로 고단해 보이는 어느 아저씨는 장례식장 복도를 걸어오면서부터 눈물을 보이셨다. 여러 명의 동료들은 떠난 도련님 얘기들을 했다. 그분들의 눈물과 전해 들은 도련님의 또 다른 모습들에서 잘 사셨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유독 곁에서 도와주셨던 분이 계셨다.  많은 것들을 또 다른 형님의 수족처럼 도와주시는 그분이 고마워서 나도 여러 번 감사하다고 전해드렸다. 그러던 중에  그분에게도 가족들이 연달아 세상을 떠나셨을 때 많이 힘들어할 때 자신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고 큰 힘이 되었다는 말을 하셨다.  그래서 이 상황들을 너무 잘 안다고 하셨다. 곁에 있던 내게도 감동이었고, 따스한 인간애가 장례식장안을 가득 채워가고 있었다. 

찾아오신 분들, 그러지 못한다 하더라도 한 마디의 말이 고마웠고, 말의 모든 가치를 다 했다고 생각할 만큼 감사했다. 평소에 썼던 위로라는 말안에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이상의 힘이 있다고 마음 깊이 다가왔다. 


집안 한 켠에 3년 전 도련님과 같이 찍은 가족사진을 보다가 빼서 서랍 속에 넣어둘까 하다가 그대로 내버려뒀다. 볼 적마다 이제는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잠시 멈짓하지만, 선명하게 남겨진 "한 번 살기"를 내 머릿속에 남겨주고 가셨다는 생각을 했다.

두 번도 아닌 한 번 사는 시간은 어느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는 일.  긴 시간이든, 짧은 시간이든 한 번 살기는 변함이 없다. 흔적 없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것을 넘어서 하늘나라의 소망을 안고 한 번 살아가기에 더 간절해지는 것들은 무엇인지 물어본다. 그리고 그 곁에 있는 사람들, 앞으로 만나게 될 사람들, 그 많은 사람들 중 누구에게라도 그 값진 마음을 옮겨 담듯이 전해질 수 있다면 종겠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 있을까?...

도련님과 마지막 말을 나눈 중환자실에서의  5분, 그 간절했던 시간, 다시 돌아오지 않은 그 중환자실의 시계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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