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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복 Sep 30. 2016

# 시인 오은 작가를 만나고

詩를 쓰는 사람 

겨우 채운 열개의 브런치 글을 보기가 부끄러워 #10번째 문을 열고 들어간다.


브런치 작가라고 하지만 나는 아이들과 있으면 아이들 엄마지 작가는 아니기에 글을 쓰는 정체성들은 오로지 책을 내어야만 진짜 작가가 될 수 있는가 물음들이 들 적이 있다.

그 작가라는 이름이 무엇인지..

나는 글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지만, 글을 쓰는 일상은 작가가 아닌 취미로 분류되는 것이 아쉽기만 하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기에 마침내, 기어이 작가라는 이름표를 가슴 위에 달고 싶은 건지 내가 내게 늘 묻고 있다.


그런 나의 불투명한 의미 속에 살아가다가 진짜 작가인 분들을 만나게 되면 마음속에 어떤 동경의 대상처럼 그분들을 바라보게 된다.

오래전 박범신 작가님과, 이철한 작가님을 도서관 특강에서 눈앞에서 그분들을 만나게 된 적이 있었다. 어떻게 그런 수많은 언어들을 그렇게 만들 수 있는지 눈앞에서 보는데도 아득한 세상을 대면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또 다른 작가 한 분을 이번 주에 만나게 되었다. 

주말 가족들과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 연결되어 있는 문학관 앞에 현수막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홀리듯이 따라 들어갔다

'나를 위한 시 쓰기'라는 주제로 시인의 특강을  들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평소에는 그 문학관이 있어도 들어가 본 적이 없었는데 그곳 내부에서 눈길이 닿는 것마다 문학가들의 글들이 그렇게 많은지 책을 보는데  떨림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번 주 시를 쓰는 오은 작가님을 보게 되었다.

 준비해오신 글에 대한 얘기들을 따라 듣는데 마치 물에 닿자마자 녹아들어 가는 형체처럼 얘기에 빠져 들어갔다.

제일 처음은 이것이었다.

" 시심과 영감" 

어떤 독자가 작가님께 글을 그렇게 잘 쓰시는데 영감이 그만큼 끊이지 않는 거냐고 물었다고 했다.

대답은 "아니오". 시심은 나이 70인 할머니이신데도 뒤늦게 꽃피기도 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궁금해하는 호기심이 시심이라고 표현해주셨는데, 이런 순간은 하루에도 몇 번이고 찾아온다고 했다.


사랑  (허옥순 할머니 글)

눈만 뜨면

애기 업고 밭에 가고

소풀 베고 나무 하러 가고

새끼 꼬고 밤에는 호롱불 쓰고

밥 먹고 자고

새벽에 일어나 아침하고

사랑받을 시간이 없더라


 작가님의 글 라이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림 속에서 작가님의 글 시간들을 듣기 위해 본 그림 위에 , 나는 어떤 지점쯤에 서성이고 있는지 자연스럽게 그림 위에 나를 세웠다.


12살 무렵 백일장에서 "돌을 던지면 하늘이 쨍그랑하고 깨질 것 같았다."라고 썼던 그 어린 날의 문장을 기억한다는 작가님의 얘기에 놀라고, 평범하지 않는 문장을 썼다고 칭찬이 아니라 꾸중을 들었다는 그 얘기에 두 번 놀랐다.

작가님의 말처럼 문학은 같은 것을 봐도 다르게 느끼는 것이라는 그 말이, 모든 글을 쓰는 사람들에 의해

다시 생명력이 있는 글자들로 태어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업 작가로 살아가는 분이 아니었는데, 글을 쓰는 시간이  부족해 일요일은 글 쓰는 날로 정해놓고 쓰신다고 했다. 글은 뭘로 쓰냐고 묻는다면 결국은 "엉덩이와 마감"이라고 하는 말에 웃었지만, 예전 박범신 작가님도 글은 엉덩이로 쓴다고 적어놓은 트위터 글을 보고서, 글을 쓰는 사람은 글을 쓰려고 앉아있는 시간이, 결국에는 글도 만들고, 책도 만들게 되는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글 쓰는 사람은 "관찰"이 중요해요."

작가님은 꼭 멀리 가지 않더라도 같은 장소의 동네 길을 걸으면서도 같은 곳을 보고, 매일매일을 관찰했다고 했다. 일명 동네 스케치.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만의 단어 사전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이분은 국어사전을 평소에도 보기를 좋아한다고 하셨다.
"글을 쓰는 사람은 마음 사전에 나만의 단어를 찾기를 해야 해요"

 "불현듯"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는 작가님은 이 단어가  '불을 켜서 불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갑자기 어떠한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는 모양'이라고 했다.

어떠한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서 그렇게 많은 시들이 쓰일 수 있었을까?

불현듯이라는 단어가 내 안에도 자주 걷잡을 수 없이 물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는 나를 향하는 일이라 말했지만, 그것이 시든 지, 에세이든지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은 스스로를 새기고 기억하는 시간이며, 나를 마주하는 일이라는 것에 한 줄 더 굵게 마음속에 적고 돌아왔다.


"그 사람이 무엇을 읽는가"는 그 사람이 "어떻게 사는가"를 보여준다는 말로 눈앞에 보였던 작가님은 다시없던 사람처럼 사라졌다.

얘기 들으며 적었던 작가님의 말들이 적힌 종이만 손위에 남아있었다.

기억하고 싶어서 브런치에 남겨본다.

작가를 보고 돌아오니 더욱 진짜 작가가 되고 싶었다.

 


 

(작가분들께 사인을 받으면 이렇게 자신만의 글귀들로 적어주시는 것이 흐름들인가보다

예전에 이철한 작가님도 사인 글귀를 한동안 줄줄 입에 달고 살았는데...만약에..아주 만약에 내가 진짜 작가가  된다면 나는 어떤 말을 적어보면 좋을까 재미난 상상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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