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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복 Feb 14. 2018

추억 속 옷장

kbs 허수경의 해피타임 4시의 쉼표 방송 사연



외출하려고 옷장 문을 열었다. 

옷장 안은 틈도 없이 빽빽하게 옷들이 가득 차있는데 막상 옷을 입고 나가려면 무슨 옷을 입고 나가야 할지 번번이 고민하게 된다.

때때로 내게 있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그것이 오히려 더 번거롭고, 고민을 주는 것 같아서 줄일 수 있는 것은 줄이고, 나눌 수 있는 것은 나누어서 좀 더 단순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들곤 했다. 

입지 않는 옷들은 재활용함에 가져다 놓으려고, 옷장에 옷들을 다 꺼내놓았더니 방 한가득 옷으로 가득 차 버렸다.

"아... 너무 많다.."

최근에 산 옷부터 아주 길게는 내가 대학생 때 입었던 옷들까지 있으니 오래전 15년은 더 된 옷들까지 옷에서 지나간 시간들이 생각났다. 

대학생 때 좀 더 성숙해 보이려고 샀던 정장 스커트도 있고, 설레고 두렵기도 했던 첫 직장 다녔을 때 입었던 옷, 남편을 소개로 만나던 첫날 두근거림으로 입었던 옷, 결혼식 끝나고 입었던 그 실용적이지 않았던 정장들까지 옷에 어떤 맛처럼 쓰고, 맵고, 단 추억이 담겨 있어서 지금은 입지 않더라도 버리지도 못하고 늘 가지고 있는 옷들이 돼버렸다.

거기에 연애 때 남편이 처음으로 내게 사줬던 주름치마는 여러 벌이고, 첫아이 임신했을 때 불룩하게 나온 배 때문에 가지고 있던 코트는 단추가 잠기지 않는다고 남편이 골라줬던 어벙한 코트도 소중한 날들이 생각나서 지금은 입지 못한다고 해도 옷들을 버리기에는 추억들을 버리는 것 같아 가지고 있게 됐다.

좀 더 단순하게 살고 싶어서 시작한 옷장 정리는 이렇게 추억들을 떠올리다 보니 버린 것보다 다시 옷장 속으로 들어간 옷들이 더 많아졌다.

큰 마음먹고 시작한 것이 한 것도 아니고, 안 한 것도 아닌 그런 정도의 정리로 마무리가 된 듯했다.

꽉 찬 옷장을 보며 나만 이렇게 추억에 연연해 버리는 사람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추억 보관은 아이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태어나서 입었던 첫 배냇저고리부터 아기띠 내복, 몇 가지 장난감들까지 가지고 있게 되었는데 먼 훗날에 아이들이 시집갈 때 주려고 옷장 제일 위쪽에 담아 놓고 가끔씩 올려다보면 웃음이 난다.

"고작 지금 5살, 7살인 두 딸이 언제 커서 시집을 가려나?..."

해마다 쑥쑥 커가는 아이들이라지만 간직하고 싶어 지는 것들이 늘어나기만 하니 어떡해야 하나 싶다.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가 옷장 정리를 잘할 수 있는 것과 단순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더 많은 것들을 늘리지 않고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잘 정리해서 사는 것이 최선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옷장 정리를 하면서 추억에 머물다가 살아가야 할 방식까지 생각하게 되었던 하루... 다시 옷장을 열고 정리를 할 적이면 지금보다도 단순하게 정리가 될 수 있었으면 했다.

"소중한 추억들을 품은 채 옷 하나하나에 입혀질 기억들이 더 많아지겠지..."

"지나갈 많은 날들이 담길 옷들에 기억하고 싶어 지는 날들이 더 많아지겠지..."

문득 생각하다가 오늘 하늘처럼 넉넉하고 정감 있는 모습이라면 더 바랄 게 없겠다고 생각했다.

 

(2015년 9월.  4시의 쉼표로 방송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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