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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복 Sep 27. 2018

#마흔, 교토에서의 하루가 지나고

교토 꽃공방에서 만난 가족의 모토

새벽은 새벽인데, 오늘은 다른 곳, 다른 나라에서 일어났다. 교토, 그러니깐 일본으로 날아왔다. 

노트북 자판 소리가 미안하리만치 고요한 새벽 어둠 속에서 가장 침침한 불을 켜놓고 쓰고 있는 나, 이 시간이 아니면 쓸 수 없다는 생각에 서둘러 적어본다.  

쓴다는 것은 무척 설레는 일이기도 하고, 낭만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 속에 또 다른 나 하나를 냉장고 열듯 열어보는 일 같다. 꺼내 먹지 않으면 쌓여가거나 상해버리고, 텅 비어 있으면 왠지 허전해지는 냉장고. 맞다.. 그런 것이 내 속에서 있는 것 같다.  다른 나라에 오니 더 기록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진다.  


교토. 

많고 많은 곳 중에서 왜 이곳에 왔을까? 이렇게 묻는다면 적절한 타이밍에 만난 곳이라고 설명하고 싶다. 올해 5월 결혼 10년이 된 이유로 여행을 가기로 10년 전 우리들은 정했었다. 홀연히 떠나는 여행 말고, 작정하고 떠나는 여행에는 더욱 이유들이 있는데 그 떠남의 시작은 '결혼기념일' 이었다.

10년이 지난 후의 여행이라.. 그렇지만 떠날 시간이 금세 돌아왔다.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막연한 약속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빠르게 마주하다니... 마술이 있는 것을 없게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지만, 지냈던 시간의 길이도 짧다고 느끼게 만드는 망각의 마술도 부리나 보다.  


#일단 멈춤, 교토

신혼여행지로 보라카이를 다녀온 이유로 10년이 지난 후, 그곳에 다시 꼭 가보기로 했다. 그런데 올 초에 비행기를 예약하려고 하는 그때에 부부는 서로 황당한 뉴스를 보게 됐다. "보라카이 6개월 여행금지' 

"이럴 수가.."그야말로 마치 우리들에게 들으란 듯이 라디오에서 뉴스에서 보라카이에 대한 소식이 들렸다. 한 번도 변하지 않았던 여행지였는데 그 타이밍은 기가 막혔다. 어디로 가야 하나..

잠시 갈 곳 잃은 새처럼 있었지만, 다른 곳이라도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자 여행지에 대한 생각들은 날개를 단 듯이 생각만으로도 멀리멀리 뻗어나갔다. 여행이 떠나는 시점에 여행이 아니라 떠날 곳을 정하는 자의 경계 없는 자유로움은 여행으로서 충분했다. 새의 날개에 비할 바가 안되는 것 같았다.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날아갈 수 있었으니깐.. 

그렇게 마음 비행을 하던 중에 내게 책 한 권을 권해준 언니가 있었다. 그리고 아주 단순하게도 난.. 곧 그곳으로 정했다. 

어떤 책이길래 그렇게 보자마자 가고 싶었는지 다시 묻는다면 책표지에서 봤던 한장의 사진 때문이었다. 거리의 모습이 보이는 커다란 창가, 정갈한 식탁 위에 그릇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 불빛은 내가 좋아하는 은은하고 포근한 향기가 빵집 불빛, 식당 주인의 따뜻한 느낌이 베여있는 식탁 사진 한 장을 보고서 가고 싶었던 곳, 바로 교토다. 남편은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정해보라고 했으니 바로 우리들의 여행 예약도 곧 정해졌다. 


#10년 전과 10년 후의 다른 모습

진짜 가는지 실감이 났던 건 여행 가기 전날 가족의 옷들을 챙기던 때부터였다. 짐가방 속에 첫째 딸, 둘째 딸, 남편 옷, 그리고 내 옷. 

옷장을 오고 가며 사흘 묵을 옷들을 꺼내놓고 고민하고 있자니 실감이 났다. 생애 최초로 비행기를 타는 여덟 살 둘째 딸도 그래도 몇 번 타봤던 열 살 첫째 딸도 나름의 여행 기분을 내고 있었다. 

진짜 가는구나.. 새벽에 "일어나" 한번 말했을 뿐인데, 마치 인형처럼 곧장 전날에 챙겨놓은 옷을 입고선 나타난 아이들을 보니깐 여행이 좋긴 좋구나 싶었다. 

인천공항에서 칸사이. 비행기는 갈듯 말 듯 드넓은 평지를 유유히 미끄러지다가 몸전체에서 엄청난 굉음을 내더니 땅으로부터 거대한 몸체를 풍선처럼 들어 올렸다. 사선으로 점점 하늘에서 잡아 줄을 잡아 당기듯이 올라갔다. 몸도 기울고, 마음도 기울고 진짜 떠난다. 

점점 시야에서 멀어지는 땅 위에 것들이 아주 조그맣게 멀어졌다. 

그 짧은 순간 기분이 오묘했다. 아니.. 비행기가 이륙할 때마다 그랬던 것 같다. 땅으로부터 멀어질 때 마치 하늘로 올라가서 다시는 내려오지 못한다면 땅 위에 있는 것들을 다시 만나지 못한다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땅을 밟아야 엄마도 보고, 아빠도 보고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데...  


#비 내리는 교토

공항에 내려 복잡한 수속들을 끝내고 밖을 나왔더니 비가 내렸다. 비가 오는 교토라.. 나는 더 좋았다. 

얼굴도 다르고, 국적도 다른 사람들이 모여있는 공항 앞은 거대한 다른 세상 같았다. 칸사이공항에서 하루카 열차를 타고 다시 비행기를 탄 시간만큼 교토역으로 출발했다. 그곳은 우리가 사흘 동안 묵을 숙소가 있는 곳이다.


#서로가 보고 싶은 것들 

같은 여행지에 왔어도 같은 거리를 걸어도 관심이 있는 것들이 다 달랐다. 

여덟 살, 열 살 딸은 문구, 잡화 가게만 나타나면 인형과 슬라임, 초코렛,사탕, 뽑기 기계 앞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는 적당히 단정하고, 적당히 아름답고, 적당히 착한 가격의 옷 가게가 나타나면 들어가기 바빴다. 거기다 액세서리가 가게도 있었고, 어제 첫 여행의 굵직한 기억을 안겨주었던 꽃 공방도 그랬다. 

그렇다면 남편은.. 아이들도 나도 손에 자신들이 원하는 것들을 사들고 나왔는데, 남편은 아무것도 없어서 미안했다. "여보도 사고 싶은 것이 있으면 사요. 당신이 관심이 있는 것은 ?" 그 말이 떨어지기가 짧게도 "테니스 운동복"이라고 대답했다.  


#꽃 공방에서 만난 가족의 모토와 가훈, 그리고 주인아저씨의 선물

거리를 지나가다가 꽃이 진열된 한 가게 앞에 발길이 멈췄다. 그리고 그곳에 꼭 들어가고 싶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그 좁은 통로 안이지만, 액자로 걸어놓은 꽃그림들이 한 발씩 올라갈 적마다 더욱 설렜다. 그리고 그 공간에 들어가서는 머릿속에 "아.. 이곳을 오다니.."그런 생각이 들었다. 

들어가자마자 꽃들이 가득한 공간 안에는 그야말로 꽃 세상이었다. 꽃 그림에 꽃 장식들, 꽃 편지지, 꽃 컵.. 눈이 커지다 못해서 자석처럼 하나하나 보는 물건들마다 시선이 떼어질 줄 몰랐다. 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없겠지만, 유난히 꽃에 반응하는 나의 심장을 느낀 건 글씨를 쓰고 나서부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하나 찬찬히 들여다보다가, 눈에 미동 없이 들어온 글자에 시선이 멈췄다. 

"무슨 뜻일까?" 남편에게 뜻을 물어보다가 그 뜻을 듣고 더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매장 안에서 꽃들의 축제속에서 마치 주인공인 것처럼 무심히 진열되어 있는 글씨는 분명 그곳 가게에서 큰 무언가를 느끼게 해주는 것 같았다. 

우리 부부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다가 모르는 것을 주인아저씨께 여쭤보니 아내가 쓰신 글씨라고 했다. 아내분은 글씨를 쓰는 분은 아니지만, 공방을 하면서 써놓았던 글씨라고 했다. 하나는 가족 모토, 하나는 가훈. 

오래전 집안 어딘가에 크게 적혀있을 만한 것들이라 생각되겠지만, 그것을 읽으면서 여기를 와서 이런 것을 만날 수 있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희망으로 일어나고
유쾌하게 일하고
감사하게 잠잔다 

글씨를 쓰면서 좋은 말들을 많이 만나는데 일본에서 만난 이 세 줄은 마음속의 통로를 말끔하게 훑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그 옆에 가훈도 공방 멋지게 걸려있는 말들도 하나 하나 뜻을 물어가면서 듣고 있자니, 나의 기질은 어딜가도 변함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문한 것들이 많아서 뭐라도 더 사야한다는 생각이 들어 계산을 하자 아저씨께서 조금전에 유심히 봤던 꽃 달력을 가져와 선물이라며 주셨다. 

아..2018년도 달력인데 세장 남은 달력이지만, 2018년의 시간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선물이었다. 

숙소에 돌아와 꽃달력을 넘겨보다가 이곳을 안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다시 한 번 들었다. "집에 돌아가면 어디에 걸어놓을까"하는 그런 기분좋은 생각과 함께..

교토. 그 곳에서의 첫날이 지나고 다시 맞이한 하루, 오늘은 어떤 교토를 만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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