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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복 Jun 07. 2019

#회사생활 15년의 쉼표

#15년 일한 남편에게. 제주에서

간신히 할 일들을 가기 직전까지 해놓고 가방을 꾸렸다. 

헉, 헉 소리가 나올 만큼 짬이 없이 빼곡한 일상에 잠도 부족해서 눈이 감기지만, 나에게는 점점 할 일들이 생겨가고 있다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이 참 좋았다. 나도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 기다려지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 잘해보고 싶은 것, 무엇보다 좋아하는 어떤 일이 있다는 것이 좋다. 결혼 11년 차에 흘러가고 있는 나의 모습이다. 


동시에 남편은 올해 회사에서 근속한 15년이 되는 해이다. 

작년부터 휴가가 나온다며 우리들은 어디로 떠날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여행을 간다는 생각에 들떴다가 15년이라는 회사 생활을 한 남편을 생각해봤다. 

집에 와서는 한 번도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지 않아서인지 잘하고 있는가 보다 생각했는데, 어느 날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던 날이 있었다. 그날만큼은 그동안 무쇠 팔, 다리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만 같은 남편이 가엽고 작게만 느껴졌던 날이었다. 

한동안은 괴팍한 상사로부터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일요일 저녁이면 마음이 답답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을 때, 남편과 아빠라는 이름의 무게감들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만 다녀도 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게 그렇게 감정적인 것으로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버렸다. 책임감을 품고 살아가는 어른이라는 이름은 참는 것으로 이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는 동안 아이들도 많이 커갔고, 마음고생을 시켰던 상사도 회사에서 나가게 됐다. 그리고 남편은 회사 사람의 권유로 테니스를 배우기 시작했다. 

결혼 전에는 마징가제트라는 별명으로 축구를 조금 하긴 했지만, 결혼과 동시에 하지 못했고 아이가 태어나니깐 자신만을 시간을 갖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을 어느 날 시작하기 한 것이다. 

눈에 띄게 남편은 달라져갔다. 눈빛이 반짝 반짝이고, 마치 딱지치기를 한 아이가 양 주머니에 따온 딱지들로 기분 좋은 모습을 한 것처럼 뿌듯해 보였다. 그것이 남편의 취미가 되었고 나중에는 회사에서 테니스 동호회 회장이 되더니 대회에 나가서는 이런저런 선물을 가져오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곤 한다. 지금도 여전히. 


참 다행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무언가를 발견해서 말이다. 직장 일은 보람이나 재미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자신의 할 일들을 하는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지만 운동을 하는 건 정말 행복해 보였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오래도록 한 가지 일을 하는 것에서 많은 것들을 느낀다. 

수고로움은 말할 것도 없겠고, 아내이지만 나에게 말 못 할 것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15년 동안 근무하는 동안 회사에서 선임급이 되어서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사람은 별로 없고 위로는 더욱 없다며 이야기들을 나눌 때면 얼마만큼 회사를 더 다닐 수 있을지 자연스럽게 우리들의 대화의 주제는 바뀌어 가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회사 생활이 힘들고 즐겁지 않은 곳이라고 해도 가능하면 조금 더 오래 일을 하고 싶어 하는 남편의 모습에서 어깨 한쪽을 빌려주고 싶을 때가 있다. 


이런저런 마음들은 아내라는 이름으로 스며들어서 눈빛만 봐도 그냥 그렇게 다가오는 날이 많아졌다. 

아이들은 비행기를 탄다고 들떠서 제주도에 날아왔고, 나는 여행하는 동안 그동안 쓰고 싶어도 못썼던 것들을 적고 싶어서 노트북을 챙겨가져 왔다. 남편은 맛있는 것 먹고, 쉬는 것이 이번 여행을 떠난 저마다의 마음들이다. 

창밖을 보는 데 저만치서 바다 위에 떠있는 배들이 보이는 것이 여기가 제주도가 맞는구나 싶어서 신선한 아침이다.


to.남편에게

파도의 물살처럼 우리들은 그렇게 흘러흘러 여기까지 왔어요.

평온하던 날, 고단하던 날, 기쁘던 날, 슬픔에 목끝이 아리던 날, 설레던 날, 마주하고 싶지 않은 날, 고민이 없는 날, 고민이 많은 날, 혼자 해야 하는 날, 같이 해서 힘이 되던 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 뭐든 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날, 나와 당신만이 있던 날, 아이들의 부모가 되던 날, 이 모든 것이 남편과 아내라는 이름으로부터 시작된 날...

당신이 나를 만나던 나이 41살이던 나이를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당신은 회사에서 고군분투했겠지요.

잠을 실컷 자봤으면 좋겠다고 하던 날, 말하지도 못하고 끙끙거리던 던 날, 당신의 어깨에서 남편과 아빠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이의 묵직함을 느끼며 남자가 여자보다 강할 거라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미안해졌습니다.

아내라는 이름으로 , 여자라는 이름으로, 내가 당신보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당신을 더 강하게 가도록 만들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들이 들었어요.

점점 우리들은 나이를 먹어가고 있고, 그러는 동안 나의 눈에 당신의 뒷모습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어요.

15년동안 현관문이 닳도록 출근하고 퇴근하느라 고생많았어요.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하게 해줘서 고마워요.

그것이 당신에게 거꾸로 힘을 주기를 바래봅니다.

늘 할 수 있을거라고 말해줘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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