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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복 Oct 16. 2020

#은퇴준비생, 물 흘러가는 대로 할 수 있는 데까지

 


남편은 보통의 삶으로 생각하자면 지각생이다. 

직장 생활은 고시를 하고 나서 시작하였기에 30대 후반, 결혼 나이는 42살, 그렇게 시작했다.

결혼에 대한 마음을 먹지 않았는데 마흔이 넘어갈 무렵 불현듯 가정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유는 부모님 두 분 다 일찍 돌아가셨기에 결혼을 재촉할 사람도 없었고 결혼식장에 부모님 자리에 앉을 분들이 계시지 않아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할 즈음 나를 소개로 만났고 결혼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띠동갑인 사람을 만났다는 것에 적지 않은 고민은 되었지만 여러 가지 고개들을 지나서 부부가 되었고 두 딸의 엄마 아빠가 되었다. 12년 전을 거슬러 생각하며 사람의 만남은 뭘로 설명할 수가 없게 다가온다. 


부부가 부모가 되었다. 서로 사이좋게 엄마, 아빠라는 이름을 붙여줬고 서로의 삶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넘어 같이 희로애락 생사와 같은 크고 작은 일들을 같이 마주했다. 울고 웃고 고민하고 낙담하고 세상을 다 가진 듯이 기뻐하고 격려하고 토닥여주는 모든 감정들을 나누는 사람이면서 나이 들어가면서는 신체의 변화라던가 환경적으로 다가오는 것들 똑같이 가까이에서 느끼게 되는 사람이기도 했다. 


42살의 남편의 모습부터 54살이 된 남편을 모두 보고 바라본다는 건 당연한 것 같지만 뜬금없이 여러 가지 감정들이 뒤섞인다. 

부모님을 일찍 떠나보낸 아들로서의 모습, 한 남자에서 남편이고 부부가 되어서 살아가는 모습들, 아빠가 되어서 좋아하던 모습들, 승진해서 좋았던 모습들, 괴짜 상사로 힘들었던 날들, 취미를 발견해서 다행스러운 날들 그리고 50대이 지나고 나서는 은퇴에 대해서 생각이 많아진 모습들. 그 하나하나들이 눈에 선해서 시간이 파도처럼 철썩하고 마음에 부딪히면 눈가가 괜스레 뜨거워지기도 한다.

그런 남편의 모습들을 어느 날부턴가 쓰고 싶어서 쓰기로 했는데 멈춰지기도 했다.

그 사이 나의 삶이 캘리그라피를 만나고 직업을 가진 아내가 되었고, 또 계속 써야 할까 하는 고민도 왔다 갔다 했다. 그런데 최근에 남편을 계속 바라보며 마음속에 떠오는 말들이 나를 다시 컴퓨터 앞에 데려다 놓았다. 그렇게 목으로 넘어오는 말들을, 손가락으로 흘러가는 자판들을 두드리며 다시 한 장을 적어본다.


남편은 작년에 시험을 봤다. 은퇴 후에 할 것들을 찾다가 지금의 공부를 하게 된 거다. 작년에 1차에 시험에 붙고 이제 2주 후면 1년을 준비한 시험을 보는 날이다. 그동안 부담을 가지고 퇴근을 하고 와서도 공부하는 남편을 보며 쉬라고 했다가도 또 tv를 함흥차사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공부는 안 하냐고 하는 잔소리를 들으면서 이렇게 시험 보는 날을 가까이 마주하고 있다.


며칠 전 쓰레기를 버리러 같이 나갔다가 산책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이래도 저래도 결심을 하고 공부를 한 모습이 참 대단하다고 느꼈고 어떻든지 간에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시험이 붙고 떨어지고에 어떤 현장감이 다가오지 않았는데 곧 다가오는 시험이 되니깐 그 이후는 어떨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옮겨진다. "혹 만약에 떨어진다면 이 공부를 다시 1년 더??ㅠ" 그랬더니 남편이 말했다.

"물 흘러가는 대로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는 거지"

그 말이 왜 그렇게 마음속으로 물결치듯이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매일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공부를 하면서 결과에 초조해하고 싶지 않다는 말처럼 들리는 남편의 말. 

공부하는 모습을 매일같이 보다가 남편의 뒷모습을 찍어두고 싶었다. 찍은 사진이 아른아른거려서 만사 제쳐두고 책상에 앉아서 이렇게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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