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보다 마음이 먼저 닿았던, 그들의 이야기”
그는 늘 앉던 창가 자리였다. 따뜻한 커피는 식어가고 있었고, 창밖 노을은 천천히 지고 있었다. 오후 네 시 반. 카페의 음악은 적당히 조용했고, 종이컵을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속도도 느려지는 시간. 그는 커피를 마시지 않고, 가만히 손을 깍지 낀 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만약 그때 내가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면, 우린 지금 어떤 모습일까.”
이 생각이 마음속을 다시 휘감았다. 그날도 오늘처럼 노을이 졌고, 그녀는 앞 테이블에 앉아 있었고, 책을 읽고 있었다. 그는 자꾸만 시선이 가는 걸 애써 모른 척하며 커피를 저었고, 마침내 종이에 적었다.
“그 책, 저도 좋아해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대화, 조금 나눌 수 있을까요?”
무심한 척, 공손한 척, 그러나 마음은 뛰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던 그 순간. 그건 단순한 시작이 아니라, 그의 세계가 달라지는 첫 문장이었다.
그 후로 그들은 같은 카페에서 몇 번 더 마주쳤고, 매번 우연처럼 앉게 된 같은 자리는 어느덧 ‘둘만의 자리’가 되었다.
“혹시 전공이 어떻게 되세요?”
“저는 심리학이요. 아, 아직 학부긴 한데요.”
“아, 그러시군요. 저는 경영학이에요. 이제 마지막 학기고요.”
처음엔 존댓말을 썼다. 서로 조심스럽고, 말끝을 맺을 때마다 미소를 지었다. 커피를 마시며 나누는 짧은 대화가 점점 늘어났고, 서로의 말투를 따라 하게 됐다. 어느 날, 그녀가 말했다.
“혹시… 말 놓을까요?”
그 말에 그는 조금 놀라며 웃었다.
“그래. 나도 그 말하려던 참이었어.”
그렇게 그들의 대화는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 그는 더 자주 웃었고, 그녀는 눈을 맞추며 이야기했다.
시간은 어느새 계절을 바꾸고 있었다. 그녀는 졸업 후 인턴십을 위해 퍼스로 가야 했고, 그는 캔버라에 남았다.
공항에서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다.
“기다려줄 거야?”
“당연하지. 매일 연락할 거니까 너무 피곤해하지 말고.”
“그럼… 하루에 한 번만.”
“안 돼. 너 자는 동안에도 문자 보낼 거야.”
그는 그녀가 떠나는 게 아쉬웠지만, 그보다 그녀의 꿈을 응원하고 싶었다. 그녀는 늘 자신보다 한 발 앞서 있었고, 그런 모습이 좋았다.
퍼스와 캔버라는 가까우면서도 먼 거리였다. 그들은 매일 서로의 하루를 문자로 나눴고, 가끔은 영상통화를 하다 웃으며 졸았고, 어느 날은 바쁜 일상 속에서 하루를 놓치기도 했지만, 그것이 애틋함을 더했다.
그는 하루 일과의 끝마다 “잘 자”라는 말을 가장 마지막에 남겼다. 그녀는 “오늘도 고마워”라고 답했다.
이건 단순한 연애가 아니었다. 서로의 시간을 응원하고, 조심스럽게 관계를 가꾸어 나가는 두 사람만의 성장의 기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