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냉장고를 연 순간, 가족의 시간도 함께 정리되었다
냉장고를 연 건
정말 우연이었다.
토요일 아침, 아내는 아이들과 외출했고
나는 늦은 아침을 챙겨 먹으려다
문득 냉장고에서 반찬 하나를 꺼내려 했다.
문을 여는 순간,
나는 그 안에서 ‘정리되지 않은 시간’과 마주했다.
반찬통은 세 칸 겹쳐져 있었고,
내용물이 비어 있는 통도,
유통기한이 닷새 넘은 햄도,
옆으로 넘어간 소스 병도
조용히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선반 밑바닥에는
뭔지 모를 물기가 흘러
조금 끈적하게 굳어 있었고,
김치통 바깥은 이미 빨갛게 착색돼 있었다.
나는 잠시 그 앞에 멈췄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걸 아내는 혼자 얼마나 자주 마주했을까.”
아내는 따로 말한 적 없다.
“냉장고 좀 봐줘” 같은 말도
“요즘 뭐가 상했는지 모르겠어”라는 투정도 없었다.
하지만 그 무언의 ‘그냥 해오던 일’이
얼마나 고단한 일인지
나는 냉장고 문을 연 그 순간 처음 알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반찬통을 꺼내기 시작했다.
내용물을 확인하고,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고,
손에 물 묻은 키친타월을 들고
밑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어떤 반찬은
뚜껑에 날짜가 적혀 있었다.
'4월 3일 깍두기'
'5월 1일 미역줄기볶음'
그 글씨를 보는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아내는 정리하기 위해 정리한 게 아니었다.
그건 가족의 식사를 책임지기 위한
조용한 기록이자 기억이었다.
어떤 통은
아무도 안 먹어서
남아 있었고,
어떤 통은 거의 비워졌지만
하단 가장자리에 말라붙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자국들을 보며
우리가 식탁에서 남긴 무심함이
아내의 손끝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겠구나 싶었다.
김치통을 꺼내려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겁고, 묻어나고,
내용물은 이미 익어
김치라기보단 '발효된 추억'에 가까웠다.
그 통을 들며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건 내가 버릴게.”
한 시간 넘게 정리하고 나니
선반은 다시 여백이 생겼고,
문짝 칸마다 있던 소스병들도
가볍게 줄세워졌다.
유통기한 지난 케첩,
거의 굳은 쌈장,
다 쓴 요구르트병.
그건 단지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그동안 내가 외면하고 살았던
가족의 흔적이었다.
아내가 돌아와 문을 열고
냉장고를 들여다봤다.
잠시 정적.
그리고,
“이거… 정리했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내가 했어.
너무 늦었지만, 이제부터 내가 챙길게.”
아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조용한 고개 끄덕임 안에
수년치 미안함과,
이해받는 마음이 섞여 있는 듯했다.
그날 밤, 아이가 물었다.
“왜 아빠가 냉장고 정리했어?”
나는 대답했다.
“아빠도 이제 우리 집
음식에 책임이 있어야 하니까.”
딸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럼 김치통도 들었어?”
나는 웃으며 말했다.
“들었지. 무겁더라.”
냉장고를 닫으며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이건 단지 음식 정리가 아니다.
냉장고는 가족의 시간이 쌓이는 곳이고,
그걸 돌본다는 건
삶의 정중앙을 함께 감당하겠다는 마음이다.
나는 그제야
진짜 아빠가 되는 문을
조금 열 수 있었다.
→ 유통기한 체크는 선반별로 분류해서 보기 (문짝, 상단, 하단)
→ 자주 안 먹는 반찬통은 ‘2주 이상 남으면 폐기’로 원칙 세우기
→ 바닥 물기 닦을 땐 키친타월+중성세제 or 베이킹소다 + 따뜻한 물
→ 김치통/국물류 보관은 가장 아래칸 고정, 새는 통은 교체
→ ‘정리날’을 가족이 함께 정해 2~3달에 한 번 루틴화하기
냉장고를 정리하며 나는 처음 알았다.
우리가 흘려보낸
수많은 하루가
그 안에 조용히, 말없이,
쌓여 있었다는 것을.
〈9화. 딸의 머리핀 정리함 – 예쁘다는 말보다 필요한 것〉
서툰 손으로 머리핀을 정리해 주며
나는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아이에게 정말 필요한 건
예쁘다는 말보다,
‘시간을 함께 써준 사람’이라는 확신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