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연의 하루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8화 “노트 한 권 – 그가 남기고 간 말 없는 기록”

by 라이브러리 파파

그의 이름은 한길수였다.
60대 초반, 입소한 지 5개월 만에
아무 인연 없이 퇴소한 분이었다.

그는 조용했다.
정해진 시간에 식사하고,
낮잠은 같은 각도로 누워 잤고,

모든 대화엔 “예.” 아니면

“괜찮습니다.”만 반복했다.

그의 하루엔
말보다 공백이 더 많았다.
그 침묵이 낯설진 않았지만

가끔 그 속에서 길을 잃을 것 같기도 했다.

어느 날, 퇴소 준비를 하던 중
간호사가 그의 사물함을 정리하다
노트 한 권을 내게 건넸다.
“선생님, 이거… 두고 가셨어요.”


Leonardo_Phoenix_10_Prompt_EnglishA_soft_pencil_sketch_of_a_wo_0.jpg

검은색 무지 표지.
이름도 날짜도 쓰여 있지 않았다.
나는 손끝으로 책등을 천천히 만지며
그의 체온이 남아 있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노트는 생각보다 두툼했다.
속지를 넘기니
규칙적으로 써 내려간 글귀들이 보였다.

긴 글은 없었다.
짧고 뚝뚝 끊긴 문장,
다 적고 지운 흔적,
어디선가 베껴온 것 같은 시구,
때로는 단어 하나만 덩그러니 적혀 있었다.


“기억은 아픈 것을 감싸 안고 묻는 것이다.”
“말하지 않으면 잊히는 줄 알았다.”
“나는 매일 조용히 사라지고 있다.”


그 글들은 마치
그가 마음속 어딘가에서 조용히 떼어낸
하루의 조각들 같았다.


나는 한 장, 한 장
조심스럽게 넘겼다.
그리고 마지막 장을 펼쳤을 때,
거기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완전히 백지였다.
그 어떤 낙서도, 점 하나도 없었다.
노트 내내 빼곡하던 글이
마지막에서 멈춰 있었다.


그 빈 페이지를 한참 바라보다가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 침묵은
그의 삶이 멈춘 자리처럼 느껴졌다.


그는 아마
마지막 문장을 남기려다
그만두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아무것도 더는 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을지도.
어쩌면,

그 빈칸이
그 자체로 그의 말이었는지도 몰랐다.


나는 노트를 다시 덮으며 생각했다.

우리가 누구의 하루를 기록할 때,
무언가 ‘쓴다’는 것은
사실 스스로에게 ‘남긴다’는 것이라는 걸.
그가 써둔 짧은 글들은
결국 나에게 ‘읽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를 놓지 않기 위해 남긴 기록이었다.

퇴근길, 나는 그 노트를 품에 안은 채
버스를 탔다.

창밖은 흐려 있었고,
어쩐지 내 마음도 그와 닮은 날씨였다.
그는 떠났지만

그가 남긴 말 없는 문장들은
내 안에서 아직 살아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나도 모르게
하얀 종이를 자주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가끔은
무언가를 적기도 했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
때로는 아무것도 쓰지 않은 채
그냥 페이지를 넘기기도 했다.


그의 노트는
지금도 내 책장에 있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조용히 하루를 감싸 안고 있다.

돌봄이 끝났다고 해서
관계가 끝나는 건 아니다.
그가 떠난 자리에도
나는 여전히 머물러 있었다.


그가 남긴 말 없는 기록을,
내 마음으로 계속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Leonardo_Phoenix_10_Prompt_EnglishA_pencil_sketch_closeup_of_a_0.jpg

※ 9화 예고
다음 편에서는 지연이 음악에만 반응하던 한

남성 환자와의 기억을 떠올립니다.
말은 없었지만, 음악이 흐르던 순간
마음이 어떻게 문을 열었는지를 그려갑니다.



이전 08화《지연의 하루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