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벽에 그리던 가족들 – 그녀의 그림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처음 그 그림을 본 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오후였다.
병동 순회 중, 308호 병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고
나는 조용히 문틈 사이로 들어섰다.
그녀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벽에 연필로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그림은 아주 단순했다.
사람 셋.
하나는 키가 컸고,
둘은 작았다.
가운데 작은 사람 옆엔 ‘은비’라는
이름이 흐릿하게 적혀 있었고
조금 떨어진 곳엔 ‘엄마’라는
단어가 조심스럽게 덧그려져 있었다.
나는 한참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림, 누구예요?”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우리 가족이에요.
이건 예전에 내가 매일 그렸던 그림이에요.”
이름은 강진아 씨.
40대 초반.
입소한 지 3개월쯤 됐고,
말을 걸면 순하게 반응했지만
표정은 자주 멍해졌다.
그녀는 병실 벽에 같은
그림을 여러 번 그리고 있었다.
닳은 연필심으로,
매번 같은 구도로,
작은 손들, 웃는 입,
하지만 언제나 얼굴은 자세하지 않았다.
그림의 사람들은 표정이 없었다.
기억은 남아 있지만,
감정은 지워진 것 같았다.
나는 그 그림을 사진처럼 기억했다.
매일 조금씩 위치가 바뀌고,
어느 날은 그려졌다가,
또 어느 날은 지워졌다.
마치 기억이 흐릿해지는 속도에 맞춰
그녀의 가족도 조용히 벽에서 사라져 갔다.
그녀는 말했다.
“가끔… 얼굴이 생각이 안 나요.
이름은 알겠는데, 눈이 기억이 안 나요.”
그 말이 너무 슬퍼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느 날,
벽에 그리던 가족 그림이 사라졌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도
그녀는 더 이상 그리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요즘 그림 안 그리세요?”
그녀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지우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남아 있으면, 괜히 더 힘들어요.”
그 말에 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녀의 그림이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건,
기억을 포기하려는 게 아니라
기억을 끌어안지 않으려는 선택 같았다.
너무 오래 그리면,
더 많이 아플 것을 알기에
먼저 손을 놓는 마음.
나는 조용히 연필 하나를 종이에 감싸서
그녀의 침대맡 서랍에 넣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다시 그리고 싶어질 때를 위해.
며칠 뒤,
나는 병실 벽에서
연필 자국을 아주 작게 발견했다.
그림은 아니었다.
그냥,
작은 동그라미 두 개와,
짧은 선 하나.
아마도 눈과 입.
아마도, 딸아이의 얼굴.
그녀는 나중에 말했다.
“그거, 그린 거 아니에요.
그냥… 기억나는 것 같아서요.”
나는 그 말이
그녀가 다시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라는 걸
조심스레 느꼈다.
지금도 나는 그 병실을 지날 때면
벽을 한 번 쳐다본다.
더 이상 그려지지 않은 벽.
하지만 그 위엔
보이지 않는 가족의 온기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다.
돌봄은 때때로
기억을 지켜주는 일이다.
그리고 더는 그리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을
대신 기억해 주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언젠가 그녀가 다시
연필을 들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림이 아니라,
기억을 그리듯.
그리고 그 곁에서
그녀가 지우려 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기를
천천히 기다려본다.
※ 8화 예고
다음 편에서는 지연이
노트 한 권을 유품으로
남긴 한 남성 환자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말없이 써 내려간 글의 조각들,
그리고 한 장의 빈 페이지에 담긴
마지막 메시지를 따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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