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53GB – 내 하루의 감정이 다 지나간다

“기억은 저장되지 않고, 감정은 삭제된다”

by 라이브러리 파파

스마트폰 저장공간이 부족하다는 알림이 떴다.

사진은 지우고, 캐시를 비우고, 앱을 껐다 켠다.

그런데도 이상하다.

내 안의 감정은 점점 텅 비어가는데,

기계 안의 기록은 점점 차오른다.




하루에 사라지는 감정, 남겨지는 데이터


한국인은 하루 평균 약 1.8GB의 데이터를 쓴다.

1년에 약 650GB,

전 국민으로 치면 연간 약 3.3 엑사바이트(EB).

말도 안 되게 큰 숫자다.


그 안에는 검색어, 지도 경로,

음식 사진, 카톡 대화,

다녀온 카페의 좌표,

그리고 실시간으로 기록된 얼굴 인식까지 있다.


하지만 그날 내가 느꼈던 감정은

기록되지 않는다.




우리는 기억하려고 사는가,

저장하려고 사는가


사진은 많다.

대화도 많다.

기록도 많다.

그런데 정작,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오늘 내가 무슨 기분이었는지,

무엇에 웃었는지,

언제 울었는지조차

데이터엔 없다.


기억을 맡기려 했던 기계는

감정까지는 담아내지 못한다.




감정이 아니라 ‘반응’만 남는 삶


우리는 하루 종일 반응한다.

알림에 반응하고, 톡에 반응하고,

좋아요에 반응한다.

그러다 보니

자기감정을 느낄 여백이 점점 사라진다.


그래서 어느 날 문득

"나는 요즘 무슨 기분으로 살고 있지?"라는

질문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된다.


기록은 있었지만,

나는 없었다.




저장은 감정의 반대말일지도 모른다


감정은 흐르는 것이다.

하지만 데이터는 저장된다.

멈춰 있는 수치와 흐르는 감정은

서로 닿지 않는다.


데이터는 차곡차곡 쌓이는데,

나는 점점 가벼워진다.


기억은 사진 속에 없고,

감정은 영상 속에 없다.

그건 그냥, 지난 순간일 뿐이다.




숫자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내 스마트폰은 말해준다.

"이번 달 사용량 53GB."

내 하루는 이렇게 많았다고.



하지만 나는 묻는다.

“그 많은 데이터 속에,

진짜 나는 얼마나 남아 있었을까?”




그래서 오늘은 조금 느리게


오늘 하루,

한 컷은 카메라가 아니라 눈으로만 기억하고,

한 감정은 글이 아니라 가슴으로만 새기고,

한 순간은 전송하지 않고 그냥 품고 가기로 했다.


우리는 너무 많이 남기고 있다.

그래서 정작, 잊지 않아야 할 것을

잃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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