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OLUTION ZERO – 우리가 흩어진 날》

P.04 – 신호가 닿는 곳에서

by 라이브러리 파파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요했던 도시.
전력은 끊기고, 위성은 침묵했고,

레볼 시스템마저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틈, 누군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나마—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누군가를 위한 신호였고,
누군가에게 닿고자 했던,
가족의 이름을 건 목숨 같은 전송이었다.

"신호가 닿는 곳에서, 다시 연결될 수 있다면—
우린 아직 살아 있는 거야."


[다시 잡힌 주파수, 라운의 목소리]


2035년 6월 9일, 새벽 3시 50분.
무너진 배전함 옆, 젖은 벽지와 먼지로 가득한

골조 틈새에서 라운은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 작은 불빛이 깜박였다.

그것은 자작 단말기에서 퍼져나간

신호의 반사음이었다.

“됐다… 이번엔 닿았어.”

다리 밑에 모인 아이들은 지쳐 있었지만,

라운의 말에 눈을 떴다.


불규칙하던 파동은 점차 일정한 리듬으로 바뀌었고,

오래된 리피터 장비는 약한 공진음을 냈다.
무전기는 깨졌지만, 프리덤 보급용 구형

송수신기의 회로를 억지로 이어 붙인 라운은
손등을 문지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긴 라운. 남부 폐허 구역 4C 하부 통로,

생존자 12명. 응답 바람. 반복한다…”


그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
침묵에 익숙해진 어둠이,

처음으로 작은 울림에 반응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얼굴에도 미세한 변화가 일었다.

두려움 속에서,
어디선가 ‘누군가’가 듣고 있다는

희망이 감지된 것이다.

그 순간, 라운은 속으로 조용히 되뇌었다.
“누나… 들려요?”


[로미: 신호를 느낀 소녀]


황성 남부, 폐열차 3호 칸.
로미는 잠에서 깨어난 듯 눈을 떴다.
차창 너머엔 아직 새벽 어둠이었지만,
그녀의 왼쪽 손목 아래, 이식된

레볼칩이 희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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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뭐지?”

그녀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레볼칩의 감응 수치는 보통 ‘시민 등급’에만 반응하지만,
이번 진동은 이상했다.
익숙한 파형. 가족 신호 대역의 잔향.

“이건… 라운…?”

로미는 조심스럽게 손바닥을 펴고,
그 위에 손가락을 댔다.
감응 훈련에서 배운 ‘접속 시도’의 기본자세였다.
보통은 시스템이 막아야 했다.

그러나 제로 존 근처의 통신 공백 속에선
레볼 시스템의 간섭이 약해지고 있었다.


[감응 링크 시도 중… 주파수 불안정 / 대상 신원 확인 불가]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신호는 약했지만, 따뜻했다.
수많은 전자 신호 속에서, 단 하나의 울림이 있었다.


그건 라운의 목소리였다.

“여기 있어, 오빠… 들려…”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손끝이 떨렸고, 심장 박동은 점점 빨라졌다.
그러자—

[임시 감응 성공 / 가족 코드: MATCHED]

붉은 빛이 그녀의 손바닥을 따라 퍼졌다.
그 순간, 폐열차 안에 잠들어 있던 아이들 중

몇 명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감응 파동은 주변에 있는 감응자들에게도

퍼져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로미 언니… 지금 뭐 한 거예요…?”

“괜찮아. 누군가… 우리가 있는 걸 알아냈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창밖의 어둠을 뚫고 먼 북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누군가가 응답하려 하고 있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신호는, 마음이었고
지금, 다시 연결되고 있었다.


[제인: 연결을 복원하는 손]


황성 북측 폐기 연구소 구역.
제인은 어둠 속에서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앞엔 부서진 데이터 송수신 모듈,
그리고 손에는 반쯤 녹아내린 솔더링 인두가 있었다.


“라운… 로미… 누군가는 신호를 보냈어. 그렇지?”


그녀는 바닥에 널브러진 회로 조각들을 하나씩 주워 모으며
폐기된 인공지능 시스템의 단말기에 접속을 시도했다.
이 장치는 10년 전 그녀가 만든

가족 통신 모듈의 실험작이었다.
이제는 규격이 맞지 않지만, 그녀는 손끝으로 맞출 수 있었다.


[Deprecated port detected. Override required.]

“Override…? 지금은 내가 기준이야.”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백도어 명령어를

직접 입력하기 시작했다.
기억 속 깊은 곳에서 하나하나 끄집어낸 문자열.
그건 프로그래머의 언어이자, 엄마의 언어였다.


sudo_reconnect: /fam-sig_restore /priority:child

access_route: class-ZH23 (hidden)

override_key: motherpulse_0915


[Access granted.]


순간, 단말기에서 붉은 빛이 퍼지며
폐허 속 송수신 안테나가 다시 살아났다.


Leonardo_Phoenix_10_A_woman_with_tiedback_hair_her_hands_marke_0.jpg

“됐어.”

그녀는 미세하게 손을 떨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로미의 신호가 복기되며,

라운의 음성 파형도 중첩되기 시작했다.
분리된 좌표가,

하나의 연결 지점으로 응축되고 있었다.

“둘 다 살아 있어…!”

그녀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한 문장을 속삭였다.

“엄마가, 다시 연결할게.”


[다비드: 침묵 속을 걷는 발자국]


사이렌은 꺼졌다.
무인 정찰기가 떠다니는 공기조차 조용했다.
다비드는 황성 외곽 차단구역의

바닥을 밟으며 걸었다.
그의 발 아래엔 무수한 사람들의 발자국이,
그리고 그 위엔 시간이 쌓아올린

침묵이 가라앉아 있었다.

“이곳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그는 방독 마스크를 목에 걸고,

레볼칩이 꺼낸 지도를 다시 펼쳤다.
그곳엔 보이지 않는 길 하나가 있었다.
‘차단구역 C-0. 송신기 루트 임시 개방 중’
누구도 알지 못할 메시지를,
그는 감각으로 읽을 수 있었다.


Leonardo_Phoenix_10_A_lone_man_stands_on_a_cracked_rooftop_at_0 (1).jpg


[신호 접근 범위 8.2% 상승]
[생체 인식 교차감응 활성화 중]


“로미… 라운…”

그는 낮게 이름을 부르며,
발자국 하나하나에 감정을 실어 걸었다.

돌연, 우측 경계 벽의 그늘에서
감응 붕괴로 변형된 구조물이

파열음을 내며 무너져 내렸다.
그는 재빨리 무릎을 굽혀 방어 자세를 취했다.
무너진 콘크리트 조각 위로,

파편화된 군용 드론 하나가 보였다.
그는 그 조각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DFU-03. 구급전용.’
그것은 딸에게 주기 위해 몰래 빼돌린

마지막 장비였다.


“이걸… 다시 써야겠군.”

그는 조용히 드론의 부속을 교체하며,
신호 송출 장치를 극한까지 조정했다.

그리고, 다시.
그는 걷는다.
모든 신호가 닿지 않던 침묵 속을,
이름만을 따라 걸어가는 발자국으로.



[연결: 다시 만나는 선들 위에서]


06:42,
남부 차단구역 지하 송신 터널의 중심에 위치한 관제 코어.
거긴 더 이상 시스템이 통제하지 못하는 곳이었고,
어디서도 실시간 감응이 불가능했던 "제로 포인트"였다.


그런데…
신호가 닿았다.

처음엔 희미한 전압 변화였고,
곧 이어진 건—이름이었다.

“로미, 들려?”

“라운…? 진짜야…?”

“엄마가 신호를 열었어. 아빠도 곧 도착해.”

그 짧은 문장들이 터널을 울렸다.
각자의 주파수로 살아 있음을 말하던

네 사람의 파동이,
한 지점에 겹쳐지며 강하게 진동했다.


[신호 일치율 94.3%]
[생체 리듬 교차 확인]
[FAMILY CORE 감응 조건 충족 – 임계치 도달]


로미는 떨리는 손으로 송신 패널을 눌렀다.
아직 완전히 열리지 않은 회선,
그러나 그 너머에서 라운의 목소리가,

제인의 숨소리가,
그리고 다비드의 말 없는 진동이 동시에 들려왔다.

“신호를… 다시 잡았어.”

동시에, 차단구역 외벽 상단.
다비드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제인은 기기 내부에서 가족 연결 로그를 확인한 뒤
“됐어…”라는 짧은 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라운은 송신기 옆에 앉아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이제 진짜 시작이야.

제로가 아니라—여긴 연결의 시작이야.”


그 순간,
차단구역 지하 전체에
새벽 햇살보다 먼저 희미한 감응

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레벨’도 ‘프리덤’도 없던 공간에서,
이제 하나의 이름이 시스템을 다시 쓴다.


Leonardo_Phoenix_10_A_glowing_underground_signal_chamber_where_0 (1).jpg


“FAM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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