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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ire Aug 05. 2021

할머니 꼬순내

할머니 짐을 정리했다. 엄마와.

한 달 여만에 문을 열었다. 할머니 집은 늘 따스했다. 유독 따뜻한 햇살이 거실 반을 채우고 할머니 온기가 아득히 고소했다. 문을 열자 꼬순내가 코를 찔렀다. 뒤축이 닳아버린 신발 위로 길게 늘어진 햇빛에 눈을 찔렸나,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라 나도 모르는 새 흘러내렸다.

할머니는 마지막 순간까지 주변을 깔끔하게 정리했나 보다. 모든 것이 꼭 꼭 제 자리에 반듯이 있다. 항상 닦고 쓸고 개고 넣고, 수일이 지났지만 어느 곳에도 시간의 먼지를 찾을 수 없었다. 다만, 할머니만 없다. 찾을 수 없다.

우리 할머니는 예인이었다. 그림도 노래도 춤사위도 요리 솜씨도 글씨도. 부산에서 알아주는 재주 많은 멋쟁이가 서울로 시집와 ‘깃발 날렸다’고 했다.

이것저것 챙겨, 닳아 바랜 신발을 한 편으로 치우고 나서는데, 문 앞에 빼뚤빼뚤 글씨가 우릴 멈추게 했다. ‘까쓰한번 더 봅시다.’

병이 심해질수록 손이 떨리고 걸음을 걸을 수 없었다. 손이 떨려 글씨를 예쁘게 쓸 수 없었고  일어나 걸을 수 없었다. 가만히 그 자리에서 쉬는 것을 가장 못 견뎌하던 부지런이 할머니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상황을 격렬히 부인했다. 그래서 슬펐다. 빼뚤빼뚤 글씨일지라도 매일 기억을 붙잡으려 이야기를 이어갔다.

모든 게 꿈만 같다. 여전히 그날 오후 네 시경부터 저녁 여덟 시 이십팔 분, 순간인가 싶었고 세상의 끝인가 싶던 시간은 꿈속에 있다. 진한 꿈을 다시 꾸고 나면 할머니가 ‘주현이 왔나’ 하며 빼꼼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이며 웃어줄 것 같다.

애지중지 예쁘다 예쁘다 만져주며 한 잎 한 잎 닦아주고 노래 불러주던 할머니의 화분들이 목이 말라 고개를 빼고 있다. 엄마가 컵에 물을 받아 시원하게 적신다. 목이 긴 가지 끝에 어여쁜 꽃이 피었다.

꿈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꿈에서 깨어 소중한 이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면 어쩌나.

할머니는 언제나 그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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