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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타 Mar 26. 2023

우리는 아주 조금씩 성장했다.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 시.나.브.로.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아빠는 두 딸을 위한 아침 식사와 도시락 준비에서 해방되었다. 아빠가 부엌살림에서 자유로워진 만큼 우리 가족은 각자의 삶에 집중하느라 일상을 함께 공유할 시간이 줄어들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아빠를 위해 식사 준비를 하고 집안일을 도맡아 하겠다고 다짐했었지만 막상 대학생활을 시작하자 그런 생각은 자연스럽게 잊혀갔다. 가끔은 아빠가 요청하는 바느질이나 다림질 정도만 해드렸을 뿐이다. 


우리 집에는 어릴 때부터 누가 시키지 않아도 직접 해야만 하는 소일거리들이 있었다. 바로 교복, 운동화와 같은 의복의 세탁과 다림질, 간단한 바느질이다. 시작은 초등학교 때 신었던 하얀색 실내화였다. 나무바닥에 기름칠을 하던 교실에서 생활하다 보면 실내화는 금세 시꺼멓게 때가 묻었고 자주 세탁을 해주지 않으면 몹시 지저분해 보였다. 우리는 빨랫비누와 세탁솔로 열심히 문지른 다음 깨끗한 물로 여러 번 헹구고 물기가 잘 빠지도록 실내화를 뒤집어 놓았다. 중학생이 되면서 더 이상 흰 실내화는 신지 않게 되었지만, 대신에 교복 와이셔츠를 매일 세탁해야 했다. 세탁기보다는 손빨래가 더 깨끗하고 마음에 들어서 귀차니즘을 무릅쓰고 목카라와 손목을 신경 써서 세탁하고 정성스레 다림질해 입었다.


어릴 때는 일상이었던 일들도 성장하면서 문득 궁금해지는 것들이 생긴다. 엉뚱하게도 언니는 언제부터 직접 손빨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을까 궁금했다. "그냥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는데?"라는 싱거운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나 역시 같은 질문을 받으면 다른 대답은 생각할 수 없을 것 같다. 보고 자란 것이 있으니 집안 내력(!)이라는 생각도 든다. 형제가 많은 집안에서 자란 아버지는 당신이 입은 의류나 속옷은 그날그날 직접 손빨래를 하셨고, 컵이나 간단한 식기류도 사용 후 늘 씻어서 제자리에 정리해 두셨다. 세탁기 안에서 아빠(!)의 세탁물을 발견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그러니 아빠가 가끔씩 요청했던 바느질이나 다림질은 우리 집 가풍 상 나 역시도 어릴 때부터 해오던 일의 작은 연장선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소소한 일들을 제외하면 대학 입학 전의 다짐이 무색하게, 아빠의 일상은 나의 우선순위에서 점점 멀어졌다. 그래도 가까운 근교로 나가서 맛있는 식사를 함께하는 주말 루틴은 계속되었다. 이 역시 아빠의 노력으로 채워진 일상이었다. 


아빠와의 추억은 곱씹을수록 정제되지 않은 모습으로 기억 속 이곳저곳에서 마구 튀어나온다. 그 추억의 말미에는 아빠가 알뜰살뜰한 노력으로 꽉 채워준 우리의 일상에 비해, 아빠에 대한 나의 정성은 얼마나 작고 보잘것없었나 하는 후회 섞인 마음이 늘 뒤따라온다. 후회와 자책의 반복은 의미 없는 감정 소모를 더한다. 그럴 시간과 정성으로 아빠와의 일상을 추억하고 잊힌 기억을 되살려보는 노력을 하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이제는 우리에 대한 아빠의 마음과 아빠에 대한 우리의 마음을 저울질하는 것을 멈추기로 했다.

넘치는 사랑을 받았으니 남겨진 자들은 그것으로 살아갈 힘을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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