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9 글감 : 뭉근하다)
*12/19(금)에 쓴 글을 퇴고했습니다.
“뭉근하다”
(1) 세지 않은 불기운이 끊이지 않고 꾸준하다
(2) 어떤 기운이나 통증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속으로 깊이 퍼져 있다
#첫 번째 조각
며칠 전, 글쓰기 모임 단톡방에서 <파이 이야기 Life of Pi>에 관한 대화가 잠깐 오갔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책 표지였다. 파란 바다 위에 소년과 주황색 호랑이 한 마리가 보트를 타고 둥둥 떠 있는 모습을 담은 일러스트였다. 그 책이 맞다. 찾아보니 우리나라에서는 어느덧 출간 18주년을 맞이했다고 한다. 원본은 그보다 전에 나왔으니까 20년은 넘었다고 봐야 맞겠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흘렀나.
18년 전이면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다. 다시 떠오른 기억. 아빠께서 원서로 사 주셨던 것 같은데 오래전이라 잘 기억나지 않는다. 영어로 그 책을 처음 만났고 좀 두꺼웠던 것 같다. 얼마 읽지 못하고 덮었던 기억도 이어서 떠올랐다. 어딘가로 가던 도중 사고로 바다에 표류하게 된 대목까지, 소설 전체로 치면 초반부까지 읽었다. 주인공이 광활한 바다를 묘사하고 자신의 생각을 읊조리는 부분에서 왜 이런 얘기를 하는지 와닿지 않아 지루하다고 느꼈던 듯하다. 어쩌면 지루하다고 느낄 정도로 영어로 책을 읽어내는 힘이 모자랐고 마음도 아직 어렸던 건지도 모른다.
그 뒤로 20년 가까이 시간이 흐른 지금 <파이 이야기>라는 제목을 다시 듣게 될 줄이야. 최근에 재조명받으면서 도서 판매 순위도 다시 오르는 듯했다. 올해 들어 이른바 ‘인기 도서,’ ‘베스트셀러’란 타이틀이 붙으면서 유행한 책들을 몇 권 읽어봤다가 크게 실망하고 연예인이나 뮤지션 추천사가 실린 책을 피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몇 번 있어서 고민된다. 단톡방에서 <파이 이야기>를 읽어보신 분들은 대부분 ‘좋았다’는 평을 내놓으셨지만, 오래전에 읽으려다 실패한 기억이 자꾸 떠올라서 더 그런 걸까. 그러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밀리의 서재’에서 책을 검색해 서재에 담아두었다.
#두 번째 조각
“지금도 글 계속 쓰고 계세요?”
“네.”
“역시. 정말 많이 좋아지셨어요. 글쓰기가 늘면 번역도 같이 좋아지거든요. 역시 꾸준히 하는 게 답이네요.“
그리고 며칠 뒤, 어떤 글을 읽다가 ’개근 거지‘라는 단어를 보게 됐다. 글에 따르면 결석 한 번 없이 학교에 나온 학생은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해외여행도 못 가 본 아이라는 멸시와 조롱이 담기 표현이라고 한다. 하아…… 성실, 꾸준함이 언제부터 이렇게까지 폄하당하는 대상이 됐나.
글을 읽으면서 며칠 전 검도관에서 호구를 쓰고 죽도를 들고 운동하는 동안 내내 속으로 투덜댔던 게 떠올랐다. 검도를 처음 시작하면 누구나 의욕이 넘치지만 3달 정도 지나 호구를 쓰기 시작하면 여기서부터 하나, 둘씩 그만두기 시작한다. 여자의 경우 4~5kg 가까이 되는 호구 장비를 얼굴에 쓰고 몸에 두른 채 운동하면서 땀을 많이 흘리는 걸 싫어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학부모님들도 아이가 얼굴에 호면을 쓰고 머리를 쾅쾅 맞는 걸 보거나 운동 전후로 무릎을 꿇고 묵상하는 걸 보고 왜 우리 애를 벌세우냐며 오해하고 싫어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들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초단이 되기도 전에 검도를 그만두는 경우가 많고, 유단자 대열에 합류한 이후에도 그렇다. 부상, 번아웃, 여자는 특히 임신, 출산, 육아 등등으로.
그러고 보니 한동안 잊고 있었다. 재작년 이맘때, ’친정‘ 검도관 관장님께 ’그래도 해달샘은 고비들 잘 넘겼어.’라고 말씀하셨던 걸. 잘하든 못하든, 잘 되든 안 되든 죽도를 잡았고, 관장님께 혼나서 울고 이 놈의 망할 호구 꼴도 보기 싫다고 치웠다가도 다음 날이면 또 죽도를 잡았다는 걸 잊고 있었다.
그 글 속 ’개근 거지‘가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