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감 : ㅇㅇ 공포증)
시작 공포증.
무언가 처음 시작할 때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는 편이다. ‘시작은 작게, 사소하게’와 같은 말이 있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시작이 무서워서 미루고 미루다가 기회를 여러 번 날린 적도 있다. 수험생 시절 이맘때만 되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하지 못한 채 시간을 보냈다.
돌이켜보면 시작이 무서웠던 이유는 뭐든 시작하면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무담감 때문이었다. 누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얘기하지도 않았는데 다른 이의 시선을 의식하고 스스로도 기준을 너무 엄격하게 잡은 탓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일단 써 봐, 일단 해 봐,라는 말을 듣고 나면 다음에 다가올 일들이 커다란 공포로 다가왔다. 막상 보니 서투른 게 드러나면, 그래서 사람들이 실망하고 떠나가면 어떡하지. 그 ’실망‘이 너무 무서웠고, 실망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가만히 있는 쪽을 택했다.
그 와중에도 마음껏 시작하고 헛발질도 할 수 있었던 일이 있다. 글쓰기, 그리기와 검도였다. 많은 사람과 한꺼번에 대면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물론 지금도 글을 쓰면서 첫 문장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여전히 고민하지만 그래도 일단 쓴다. 쓰다가 다시 돌아와서 단어, 어구나 문장을 바꾸면 되니까.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도 색이 너무 어두워지거나 흐름을 놓칠 때가 있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검도도 지금은 잠시 쉬고 있지만 ‘친정’ 검도관에서 운동할 때부터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호구를 쓰고 나면 삽질만 해댔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는 부상을 정말로 조심해야 한다는 것.)
요즘에는 전자책을 조금씩 기획해야 할 시점이 돼서 어제 오후에 저작권 제한이 풀린 원서와 번역본 관련 자료를 검색하며 떠오르는 생각을 쏟아냈다. 이 일도 시작하기 전까지는 크고 막연하게만 느껴졌는데, 막상 손을 움직여 끄적이니 시작하니 생각보다 방향이 금방 나왔다.
- 단편, 고전 명작, 익숙한 작가/작품, (학생 또는) 성인 대상, 영어 필사, 문학
- 참고할 번역본이 있는 작품으로 정할 것
- 후보: <어린 왕자>, <작은 아씨들>, <빨간 머리 앤>, <오즈의 마법사>, <비밀의 화원>, 오헨리 단편 작품들, <피그말리온>
- 필사: 너무 어렵지 않은 문장, 10~15분 분량, 손글씨 감각 유지, 감정 조절 및 관리, 최대 3작품 이내, 명문장 필사, 익숙, 재미, 루틴
- 원문, 한글 번역, 어휘 정리, 필사 공간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짧은 질문 하나 정도?)
손으로 아이디어를 적고 나자 다음을 생각할 수 있게 됐다. 어떤 작품으로 정할 것인가. 번역본으로도 여러 권 출간된 작품일수록 그만큼 사람들에게 익숙하고 번역하는 입장에서도 안전하다. 그래서 <작은 아씨들>이나 <빨간 머리 앤> 번역본이 이렇게 많구나…… 처음부터 장편을 번역해 보겠다고 덤비는 것보다는 비교적 분량이 짧은 작품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좀 더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일단, 시작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