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도를 쉬는 동안
*2/9(월)에 쓴 글을 퇴고했습니다.
지난 주보다 날이 풀렸다. 아직 바람이 차지만 이 정도면 견딜 만하다.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다 문득 든 생각. 설 연휴가 지나면 봄이 가까워지겠네, 이제 다시 슬슬 죽도를 잡아야 하지 않을까. 도장에 가지 않은 지 한 달이 넘었다. 이렇게까지 길어질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작년 크리스마스 다음 날에 운동하다가 엎어진 뒤부터니까.
작년 즈음부터 한 번 어딜 다치면 회복하는 속도가 전보다 더디다는 걸 느끼고, 계속 이렇게 운동하다가는 몸만 더 다치겠다 싶었다. 무엇보다도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최악의 상황은 검도가 싫어져서 죽도를 놓아버리는 거였다. 몸이 망가지는 것보다 더 두려웠던 건 4년 전 스스로 시작했던 검도를 포기하는 거였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다.) 한 3주 전에 몸은 괜찮은지 걱정된다는 사범님의 문자도 받았지만 그땐 여러 번 참다 터진 번아웃이 정점을 찍어서 삐딱선을 제대로 타고 있었다. 차라리 문자가 안 왔으면 싶었다. 휴식기가 너무 길어지기 전에 도장에 가야 하지 않을까 하던 차에 문자를 보니 더 가기 싫었다. 방에서 멍때리다 이젠 정말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한 찰나 부모님이 문을 벌컥 열고 “공부 안 해? 공부 좀 해!”하는 잔소리에 더 반발심이 생기듯이.
얼마 전에는 발레를 꾸준히 하고 계신 한 분이 글쓰기 모임 단톡방에서 도장을 옮겨보는 게 어떻겠냐고, 걱정된다는 댓글도 남길 정도였다. 오히려 이 분의 댓글이 계속 눈에 밟혔다.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 사회인, 생활인으로 운동하는 사람들만 이해하는 그 무언가를 여기서 느낀 듯했다. 종목은 달라도 운동하면서 느끼는 어려움은 다들 비슷한가 보다.
그동안 이사 와서 새로 다니기 시작한 도장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데엔 여러 이유가 있다. 그 중에는 은연중에 느껴지는 라떼 내지는 군대 분위기도 한몫했다. 작년 봄이었던가 초여름이었던가, 하루는 마지막 타임에 운동하러 갔다가 어르신에게 군기를 잡히고, 운동이 끝난 뒤에는 ‘나 때문에 다른 애 운동하는 거 못 봐줬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초단이라서 그렇게 서럽고 억울하고 화난 건 그때가 거의 처음이었다. 그 뒤로는 그 분이 오는 시간대와 요일을 피했을 정도다.
평소에는 아재개그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그저 조용히 웃을 뿐. 다만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농담을 하느냐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진다. 작년 초겨울, 도장에서 아재개그라기보다는 농담 섞인 라떼 같은 질문을 들은 적이 있다. 초저녁에 운동하러 갔을 때, 시간상 어른은 관장님과 사범님을 제외하고 나 혼자였다. 뒷줄에 서서 다른 아이들과 죽도를 들고 차렷 자세를 하고 서 있는데, 관장님께서 앞으로 오시더니 오늘부터는 기본기를 하나라도 제대로 연습하겠다는 말과 함께 이유를 설명하셨다.
“늬들은 지금 진짜 편하게 연습하는 거야. 나 땐 어땠는지 알아? 발도 이렇게 펄쩍, 펄쩍 뛰어서 1000번씩 쳤어!”
“정말요?”
“그래! 늬들은 복 받은 거야! 그러니까 제대로 쳐. 건성으로 하면 처음부터 다시 1000번 시킬 거야.”
뒤에서 관장님과 아이들을 바라보며 말없이 서 있었다. 그러다 나온 얘기.
“늬들 쌍화차 알지? 내가 늬들 만할 땐 쌍화차도 어떻게 마셨는지 알아?”
‘……’
갑자기 웬 쌍화차? 일단은 듣기로 한다.
“어떻게 마셨는데요?”
“계란 노른자 있지? 그거 넣어서 마셨어!”
“네?????”
“그걸 어떻게 마셔요?”
“커피에도 넣어 마셨는데?”
“우엑!!!”
아…… 여기서 들을 줄이야, 노른자를 넣은 쌍화차. ‘친정’ 검도관 관장님도 안 하셨던 얘기를…… 아이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 와중에도 나는 가만히 서서 모든 걸 보고 듣고만 있었다. 그렇게 안 보이시는데 쌍화차에 노른자를 넣었다고 하면…… 머리가 까마득해졌다. 바로 그때였다.
“해달 씨도 쌍화차에 계란 노른자 넣었죠? 뭔지 알죠?”
“네?”
관장님의 질문에 아이들의 눈이 내게 쏠렸다. 뭐여. 그 짧은 순간에도 생각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저 그렇게까지 나이 안 먹었는데요. TV 속 다방에서 사람들이 쌍화차에 노른자 넣어 마시는 장면을 본 적은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해 본 적은 없다.
“아뇨. 안 넣었는데요.”
여전히 차렷 자세로 짧게 대답했다. 다만 칼답만 하면 분위기가 싸해질 것 같아 재빨리 웃음을 지었다. 피곤하다. 실소까지 계산해야 하다니.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봐.
“사범님도 안 넣었다잖아요! 에이!!“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이제 좀 적응하나 싶었는데, 도루묵이 된 듯한 느낌. 그 날 이후로 더 거리가 느껴졌다. 쉬는 동안 도장을 옮길까 고민도 했지만 대안이 별로 없었다. 다음 달부터는 빼도박도 못하고 좋든 싫든 고단자 라떼 아재들이 대부분인 마지막 타임에 운동해야 할 판이다. 그동안 받았던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기한을 정해 두고 다닐까도 했지만 이내 에라 모르겠다, 머릿속에서 종이 뭉치를 꼬깃꼬깃 접어 휴지통에 던졌다.
지금 내 옆에는 호구 가방과 호면이 있다. ‘친정’ 검도관 관장님께서 두 번째 시합을 앞두고 마련해 주신 호면이다. 좋은 호면이니 운동할 때 번갈아 쓰라고 하셨는데…… 사실 두 달 가까이 쉰다고 누가 뭐라 하지도 않았고 큰일이 나지도 않았다. 오히려 첫 한 달에는 쉬니까 좀 살 것 같았고, 요즘에는 어깨가 살짝 찌뿌둥하지만 크게 아픈 데는 없다. 검도를 슬슬 다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면 검도 자체가 싫은 건 아니란 얘기다. 하지만 사람은 여전히 쉬이 적응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