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때부터 주관이 뚜렷하고 주도적이라는 말을 들어왔다. 엄마도 나와 동생을 비교하며, '너는 사막에 내다 놓아도 꽃을 피울 것 같아.'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사막의 꽃에 비유되는 나 자신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20대가 되면서부터 내 성격에 대해 주도적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이질감을 느끼곤 했다. 주도적이라는 특성은 마치 내 것이 아닌 양 피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내 선택들로 만들어진 지금이 과연 내가 원하는 것인지, 지금 이 선택이 미래에 어떤 결과를 가져다 줄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은 그 주도성에 대해 의문과 불편함을 갖고 살았다.
내 선택을 주도적인 것으로 완성시키는 개념은 ’ 책임‘이었다. 내가 주도성에 대해 느꼈던 이물감은 뒤따르는 '책임'에 대한 두려움과 버거움이었다. 성공이든 실패든 그 위에 내게 닥칠 상황과 감정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랐었다. 헤서 지금 생각하기로는 선택한 이 결정 다음에 오는 상황에 대해 책임을 지겠다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주도적인 결정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주도적인 결정은 책임에 대해 결국 덤덤해진다. 결국 그들에게 불확실성은 용기로 인한 희망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아이든, 어른이든 주도적인 결정 앞에서는 결국은 당당해진다. ‘감정적 서사'로 점철된 결정은 과거로 회기 되는 것이 주된 목표다. 그래서 편안해지기 위해서 결정한다. 용기를 낼 생각을 차마 하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곰팡이가 가득한 꿉꿉한 이불도 내 이불이라는 심정으로 다시 그 안으로 들어가려 한다. 그리고는 환상에 빠진다. 왠지 그 결정 하나로 곰팡이 가득한 이불이 하루아침에 햇볕에 잘 말려진 뽀송한 이불이 될 것만 같은 그런 환상에 빠진다.
나는 인정욕구가 굉장히 결핍된 사람이었고, 내 인생은 그동안 인정욕구라는 감정적 서사에 휘말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등질 때마디 이렇게 생각해 왔다. '이것만 하면 부모님이 좋아하실 텐데', '이걸 하면 좀 자랑스러운 제자가 될 텐데'와 같은 의존적인 생각들을 해왔다.
내가 원하는 결정을 하든, 감정적 서사로 인한 결정을 하든 ‘이게 맞나 ‘ 하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뒤따른다. 그러나 그 둘의 성격은 다소 상이하디. 감정적 서사로 인한 선택들을 할 때는 언제나 모호하고,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이게 맞나' 하는 생각에 먹먹한 기분이 든다. 마치 자욱한 안개가 목구멍과 머릿속에 가득 찬 것과 같은 모호하게 먹먹하고 답답한 기분이 든다. 주도적인 결정에서 하는 '이게 맞나'는 결이 분명 다르다. 주도적일 결정을 할 때 드는 '이게 맞나' 하는 생각은 이내 '이게 맞아'라는 생각으로 전환된다. 명료 담백해진다.
주도적인 결정을 하든, 수동적인 결정을 하든 다 괜찮다. 다만 내가 선택하고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인지는 하고 있어야 한다. 결정과 책임은 자아형성에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는 부담스러운 개념이라는 것을 안다. 아마 스스로 결정해 보거나, 성공이든 실패든 성취에 대한 적절한 사회적 상호작용이 부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살아있는 한, 인간의 존엄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언제나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