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개인에 관해 타인의 허락이 익숙한 사회

by 이면

늘 의아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는 12년 동안 학업에 매진한다. 학업에 매진한 이유는 대학교에 가기 위해서다. 그리고 대학교에 진학 하는 이유는 좋은 곳에 취업하기 위함이다. 학교가 대기업 공장이 되어버렸다는 비판이 나온지도 오래. 그러나 아직도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한 사교육 사투는 심화되고 있는 중이다. 강남과 목동에서부터 시작된 초등학교 의대반이 생길 정도다. 초등학생들도 이러니, 중학교나 고등학생이 되면 더욱이 개인 시간은 없다. 개인 시간을 사용하지 못한 이들이 회사에 입사하면, 열심히 일한 뒤 나만의 휴가를 갖고 싶은 그 시간마저 허락을 구하게 된다. 개인 삶에 대한 누군가의 허락이 익숙한 사회가 되어버렸다.


직시해야 할 것은 우리는 '나'를 포기하기 쉬운 환경에 있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는 환경과 구조 속에서 쉽게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삶에서 공허하고, 뭔가 무기력하고, 뭔지 모르게 불편한 느낌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인생에서 중요한 공부는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목에 한정되지 않는다.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어떤 가치를 실현하며 살고 싶은지가 교과목 공부보다 더 중요한 공부다. 그렇다고 학교만을 탓하는 것은 제자리 걸음을 하는 것과 같다. 사회 구조에서 개인의 존엄성이 지켜지지 않는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어쩌다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성적, 경쟁, 자본, 계급을 중점으로 가르쳐야만 했는지 숙론할 때이다.


필연적으로 개개인은 사회생활을 해야 한다. 사람들과 교류하고, 일을 해야 한다. 그렇지만, 청소년 시기에 공부가 아닌 다른 직업을 탐구해 보고 싶다고 표현할 수 없는 것, 성인이 되어서 성실히 회사에 출근하다가 한 달 정도 휴가를 내고 싶다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개개인이 사회생활을 하는 이유는 크게 두가지다. 첫번째, 사회적 관계를 맺기 위해서. 두번째, 자본을 얻기 위해서이다. 하나는 정서적 차원의 이유이고, 하나는 생계적 차원의 이유라고 볼 수 있다. 두가지 이유에 선행하는 개념은 바로 내 삶을 살기 위함이다. 그러니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양한 기회를 접하고, 그 과정을 탐구해볼 시간을 놓친다는 것,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만큼 일을 쉴 수 없는 것이 과연 내 삶을 살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성실하게 공부하고 일을 한다면, 우리는 자유롭게 내가 원하는 개인시간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행복추구권이다. 또한 공부라는 것이, 일이라는 것이 단순히 학업과 출근이라는 형태가 아닌 다양한 형태가 마련 되어야 한다. 조금 더 다양한 삶의 형태를 요구하고, 또 사회구조는 우리에게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 아직까지 한국사회는 개인의 시간을 갖고 즐기기 위해서, 즉 자신이 원하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누군가의 허락이 필요한 사회다. 그런데 개개인 스스로조차 내가 가진 결정권이 얼마나 소중한지 외면하고 사는 것 같다. 정당하지 않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방법을 모르는 걸까, 외면하고 있는 걸까. 그렇게 점점 무기력해지고 있는 사회가 '존엄성'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다시 재정비 될 수는 방법은 무엇일까. 분명한 것은 개인의 시간에 대해 누군가의 허락은 애초부터 필요가 없다는 것. 거기서부터 출발해 보면 어떨까.




keyword
이전 10화무엇보다 자신에게 다정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