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에서 하게 되는 말

by 이면

9.11 테러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우연히 보았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장면은 고립된 이들이 남긴 마지막 메시지가 모두 ‘사랑해, 고마워, 미안해’였다는 사실이다. 그 일이 있고 얼마 뒤 친할머니가, 이어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뒤이어 친구의 막냇동생이 스무 살이라는 허망한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변비인 줄로만 알았던 복통이 대장암 4기라는 진단으로 돌아왔을 때, 내가 친구 곁에서 할 수 있는 건 그저 자리를 지키는 것뿐이었다.

당시 나는 가족을 미워하고 있었다. 특히 동생을 심하게 원망하던 시기였다.


어느 날 동생이 내 방에서 무언가를 읽고 있었다. 여자친구가 만들어준 포토북이었다. 당시 나는 가까운 친구들에게 조심스레 커밍아웃을 이어가던 중이었다. 그 과정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누군가와는 더 가까워졌지만, 누군가에게는 거절당했다. 그 지난한 과정을 겪으며 다짐했다. 가족에게만은 절대 말하지 않겠노라고. 수용과 거절의 기로에 가족을 세우는 일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동생이 포토북을 마지막 장을 덮고 있는 동생에게, 나는 성소수자가 이상한 게 아니라고 구구절절 설명했다. 동생이 이해할 수 있을 만한 모든 경로로 설득 아닌 설득을 했다. 그저 이상한 게 아니라고, 부모님께 말하지 말아 달라고. 드라마 한 장면 같았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현관문이 열리고 엄마가 들어왔고, 동생은 바닥에서 일어나 엄마에게로 향했고, 내가 한 말을 토시 하나 빠트리지 않고 엄마에게 전했다. 뭐가 그렇게 화가 난 걸까. 동생은 내가 마치 무언가를 크게 잘못한 것 마냥 동생은 잔뜩 화가 나있었고, 그만큼 당당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멍해진 채, 그저 동생과 엄마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이후, 집에서 만두 4개를 구워 먹는 일조차 눈치가 보였다. 물컵을 집어 들 때도 울컥함이 차올라 손이 떨렸고, 어떤 날은 눈물이 컵 속으로 떨어졌다. 어느 날 엄마가 내게 말을 걸었다. 정돈되고 온화한 말투였다. 아빠에게 말할 것이니, 그 후에 어떻게 되는지 보자고 했다. 며칠 뒤, 내 방으로 다가오는 아빠의 저벅저벅 소리가 들렸다. 나를 보호해 줄 발자국일지도 모른다는 한 줄기 희망을 가졌으나 확신은 없었다.


정돈되고 온화한 말투. 아빠에게 말하겠다고, 그 이후에 어떻게 되는지 보자고. 며칠 뒤 내 방으로 걸어오는 저벅저벅 아빠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보호해 줄 발자국일 수도 있다고 희망을 갖기도 했지만, 확신은 없었다. 방 문이 열렸다. “OO아.” 아빠가 이름을 불렀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엄마가 그러는데, 네가 레즈비언이니 어쩌니 한다는데 난 그게 뭔지 잘 모르겠어. 너, 정말 그런 거니?” 어떻게 답해야 했을까. 늘 내 편이었던 다정한 아빠의 질문일까, 아니면 심판일까. 찰나의 순간 수만 가지 생각이 스쳤다. 침묵하는 내게 아빠가 다시 말했다. “그런 거라면 말해라. 내일 당장 가서 호적에서 네 이름을 파버릴 테니까.” 언제나처럼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나는 녹아, 이렇게 답했다. ‘그런 거 아니야.’


수많은 마지막을 지켜보며 깨달았다. 가족끼리 평생 목소리에 담아 전해야 할 말은 결국 ‘미안해, 사랑해, 고마워’뿐이라는 것을. 그래서 어느 날, 동생은 울면서 내게 물었다. 왜 언니가 그 힘든 길을 가야 하냐고,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고 쉬운 길을 갈 수는 없냐고. 언니가 마주할 풍파가 너무 속상하다고. 어떤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아픈 말 뒤에 아름다움을 숨긴 채 전달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전 18화"가족이 진짜 너무 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