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의 문 앞에서
스르륵, 봄의 문이 조용조용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이렇게 하나의 계절이 가고,
또 다른 계절의 문 앞에 서 있는 우리.
미세먼지로 뿌옇기만 했던 짧디 짧은 봄이
이렇게 우리 곁을 지나고 있다.
아직 내 마음은 봄볕인데, 야곰야곰 길어진 낮과
짧아진 소매가 내게 나긋하게 속삭이는 듯 했다.
“기어이 오고야 말았어, 여름이.”
여느 때보다 빨리 다가온 여름의 나날에 우리는
숲속 캠핑장으로 향했다.
벌써부터 뜨겁게 달아오른 도시를 벗어나 선선한 나무그늘 아래로, 푸르름이 만발한 숲속으로.
뚝딱뚝딱 이른 여름날 하루 묵어갈 우리의 집을
짓고,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불을 지필 자리까지 마련하고, 오늘은 해먹까지 출동 완료.
분주한 평일을 보낸 탓일까, 볕이 눈부셨던 걸까.
나무 사이로 살랑살랑 흔들리는 해먹에 홀린 듯이 잠시 몸을 뉘이고 깜빡 잠이 들어버렸다.
10분 정도였을까, 살풋 잠들었던 그 결에
나는 아주 깊고 달콤한 우주 속을 유영하고
돌아온 기분이었다.
여름이 데려온 길고 긴 오후의 시간,
나는 도시에서 드문드문 읽다 만 책을 드디어
다 읽었으며, 저녁 불멍을 위해 나무 아래 떨어진
가지들을 잔뜩 주워왔다.
주머니 가득, 두 손 가득 작은 나무 도막들을 주워 종종걸음으로 돌아올 때면 마치 도토리를 잔뜩
주워 온 다람쥐마냥 행복한 표정이 절로 나온다.
이렇게 사소하다, 행복이란 건.
이런저런 일들을 잔뜩 했음에도 아직 밖은 밝았다.
늘 무언가에 쫓기듯 바삐 움직이는
도시의 삶 속에선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버려
매일이 순식간이었다.
그러고도 돌아보면 딱히 기억에 남는 일들은 없이 그저 지나가버리는 순간들의 연속.
아이러니하게도 어쩔 땐 도시에서의 5일보다,
이렇게 자연 속에서 보내는 2일이 더 알차게
느껴질 때가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될 자유가 있고,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은 길고 긴
오후의 시간이 있었다, 이곳엔.
푸르스름한 어둠의 시간, 오후에 부지런히 주워나른 나뭇가지와 장작을 적당히 섞어 불을 붙여본다.
이번 계절의 불멍도 마지막일 것 같네,
불놀이에 가까운 작은 모닥불을 피우며 생각했다.
여름의 문 앞에서.
글 : 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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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빅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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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소로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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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스타일 포토그래퍼인 빅초이와
<시작은 브롬톤>을 쓴 작가 블리는 단순한 삶을 지향하는 생활 모험가 부부입니다.
일상과 여행, 삶의 다양한 순간을 남편 빅초이가 찍고, 부인 블리가 이야기를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