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브롬톤

내가 좋아지는 날, 그날의 브롬톤

by 생활모험가

겨우내 웅크리고 있던 나의 어깨처럼, 내 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나의 작은 친구 브롬톤.


오랜만에 꺼내 든 브롬톤은 시간이 멈춘 듯 늦가을 마지막으로 접어 두었던 그날의 모습 그대로였다.



빵빵하게 바람을 넣어 두었던 타이어는 처음의 그것만큼은 아니더라도 제법 단단했으며, 뽀얗게 내려앉은 먼지가 무색할 정도로 그 흔한 실 펑크도 나지 않은 꼿꼿한 모양새였다.


얌전한 고양이처럼 구석에 앉아 내가 일으켜 세워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나의 브롬톤.


우리는 길고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크게

기지개를 켜고, 웅크리고 있던 어깨를 이리저리

움직여 가며 가볍게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따뜻한 봄날의 페달링은 여느 때보다 가볍게 느껴져, 어느새 제법 먼 곳까지 가게 되었다.

아득하게 멀리까지 펼쳐진 길이 언제까지고 달릴 수 있을 것만 같아서였을까.


계속 가는 건 좋지만, 달린 만큼의 길을 돌아와야 하는 것이 자전거 라이더들의 숙명. 그래서 더 달리고 싶어도 돌아올 길을 생각해 핸들을 놓아야 하지만,


브롬톤은 돌아올 길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나의 엔진 말고도 ‘점프’라는 믿는 구석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조금 멀리 떠났다가 돌아오는 길이 너무 힘들거나 후회스러워지면, 나는 브롬톤을 접고 한 손으로 번쩍 들어 대중교통 점프를 한다.

그럴 때면 큰 덩치 때문에 대중교통 점프가 제한적인 여타 자전거들과는 달리,폴딩하면 자그마해져서 지하철이든 버스든 얼마든지 탈 수 있는 브롬톤의

‘절대 능력’이 새삼 고마워진다.


폴딩한 브롬톤을 들고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는 길. 승강장 한 귀퉁이에 어릿어릿 비치는 내 모습.

한쪽 어깨에는 에코백을, 한쪽 손에는 브롬톤을 들고 가는 내 모습이 그 어떤 명품백을 멘 것보다도

멋져 보인다.


행여 망가질까 모시고 다녀야 하는
명품백보다, 내 발이 되어 어디든 데려다
주는 브롬톤의 가치를 더 알고 있는
나이기에 다행이다.



계속 달릴 것을 요구하지 않고, 적당히 멈출 것을 강요하지 않는 브롬톤. 내게 자전거의 덕목을 강요하지 않는 브롬톤을 타고 나는 오늘도 달리고 싶은 곳까지 멀리 달려가 본다.






* 글 : 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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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빅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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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소로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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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스타일 포토그래퍼인 빅초이와 <시작은 브롬톤>을 쓴 작가 블리는 단순한 삶을 지향하는 생활 모험가 부부입니다.
일상과 여행, 삶의 다양한 순간을 남편 빅초이가 찍고, 부인 블리가 이야기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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