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며칠 전, 생전 처음 민망하고 치욕스러운 소개팅을 경험한 J는 다소 밭게 잡은 오늘의 소개팅이 더욱 떨린다. 앞으로의 포부와 목표를 당당하게 물어보던 먼젓번 소개팅남이 J의 머리를 광광 울린다.
‘면접관이야 뭐야.’
강추위가 예보된 날이었지만 얇은 퀼팅 점퍼에 벨트를 조여맨다. 약속은 저녁 6시 합정역 머씨커피. J는 조금 일찍 움직여 오케이어멘션에서 책을 읽다가 가벼운 허기를 느끼며 약속 장소로 이동한다. 1년 전 트레바리라는 유료 독서 모임에 참여하며 다시 책 읽는 재미를 알아가는 중이었다.
합정은 J가 대학교 1학년 때 첫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며 자주 오가던 곳이다. 벙벙한 유니폼 조끼를 입고 주말 이틀,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시급 2800원을 받으며 편의점 카운터를 지켰다. 눈치 없는 젊은 점장은 주일 예배를 마치면 교회 친구들을 우르르 편의점으로 데리고 와 그들 입에 아이스크림을 물렸다. “어서 오세요”와 “안녕히 가세요”를 오십 번쯤 반복하면 집에 갈 시간이 됐다. 한 달을 일하니 15만 원 정도가 생겼고, 어디서 들은 건 있어서 그 돈으로 할아버지와 엄마 아빠에게 속옷을 선물했다. J에게 합정은 도전, 세상, 어른이라는 단어와 비슷한 무게를 단다. 주택가 어디께쯤에서 삼각김밥을 계산하던 J는, 이제 잘 개조한 주택 카페의 무거운 유리문을 힘차게 밀고 들어선다. 따뜻하고 고소한 커피 향에 마스크 속 코가 간지럽다. 두리번거리는 J 앞에 두리번거리는 S가 있다. 말끔한 울자켓에 따뜻한 금테 안경을 쓴 남자. 12월의 스산한 바람이 애처롭게 나뒹구는 서울 한복판에서 J와 S가 서로를 알아보고 허리를 굽힌다.
두 사람의 작은 목소리는 갈 길을 잃을 법도 한데 주변의 소음을 저만치로 밀어내고야 만다. 번잡함과 부산함 속에서 서로에게 기꺼이 집중한다. 리액션에 과함도 모자람도 없다. 예를 갖춘 듯, 선을 그은 듯, 적당한 거리감이 오히려 편안하다. 두 사람은 묘한 익숙함 속에서 봄 바람처럼 설레고 겨울 공기처럼 차분하다. 책과 죽음과 와인과 종교와 삶과 어머니로 몇 차례 주제가 바뀌는 중이지만, 누구 하나 지치는 기색이 없다. 오히려 어둠이 짙어 질수록 대화의 풍미가 깊어진다.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와 영화 〈라스트 홀리데이〉 대목에서 J는 처음 본 S에게 왠지 모를 아늑함을 느낀다. 마치 고팠던 대화를 간만에 포식한 것처럼 약간은 나른하기도, 내 안의 연약한 자아를 의외의 곳에서 발견한 것처럼 가만히 탄복하기도 한다. 마음에도 틈이 있었나? 한 겨울, 시원하고 훈훈한 산들바람이 느껴진다.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를 읽고, 남편과 처음 만난 날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 써본 글이에요. 그날의 착장과 공간, 먹은 음식과 나눈 대화 들이 글을 읽을 때마다 선명해 집니다. 여러분의 '처음'은 어떠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