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벅꾸벅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by 좀머

심시선이라는 여자로부터 뻗어 나온 가지들의 이야기. 심시선이 죽고 10년째 되는 해, 제사 따위 없던 집안에서 갑자기 큰 딸 명혜가 엄마를 기리기 위한 특별한 제사를 제안한다. 일명 하와이 추모 미션. 심시선과 얽힌 추억을 토대로 그녀가 좋아했을 법한 유/무형의 것을 각자 찾아와 제사상에 올리는 것이다.



모든 챕터는 심시선이 살아생전 남긴 글이나 인터뷰 토막으로 시작해 두 남편에게 얻은 세 딸과 하나의 아들, 이들의 배우자들,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돌아가며 화자가 되는 구성이다. 소설의 첫 장이 심시선 가계도인데, 여기에 책갈피를 꽂아 놓고 수시로 보며 이야기를 따라갔다.



이름도 이름이지만 책은 읽을수록 더 재미있었다. 구구절절 삶의 지혜 같기도 모난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위로 같기도 했지만, 부서지는 파도 소리 같기도 혼자 떠들고 있는 TV 소리 같기도 했다. 어떻게 취하든 상관없을 것 같았다. 책은 어쨌든 좋고, 편안했다. 하늘을 나는 꿈을 꾸고 싶으면 자기 전 제자리에서 뛰는 연습을 하라던 동화책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나에게 이 책은 종이로 된 ASMR이었다. 읽다가 잠들면 따뜻하고 달콤한 꿈을 꾸었던 것 같다. 심시선의 가족을 따라 어느 따뜻한 나라에서 느린 버스를 타고 꾸벅꾸벅 조는, 그런 꿈.






P21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구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에 간절히 필요로 하는 모든 요소를 한 사람이 가지고 있을 확률은 아주 낮지 않을까요?


P175 타고난 대로, 어울리는 대로 말줄임표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바닷속의 온도가 다른 물줄기들은 머릿속의 생각들을 닮지 않았나 잠시 떠올렸다가 그마저도 흘려보냈다.


P231 그 어설픔이 이제는 사라졌는지? 직업적인 측면에서 느끼는 안정감이 다른 부분을 지탱해주는 것 같기는 하다. 모친이 늘 하던 말이 맞았다. 같은 일을 이십 년쯤 하면 계단 턱 같은 것을 만나게 되고 그것을 뛰어넘는 것은 성취감이 있었다. 꼭 예술이 아니라 어떤 일이라도 그렇지 않을까?


P297 마지막으로 엄마가 우는 걸 보았을 때는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였고, 그때의 엄마는 밥을 먹다가도 울고 머리를 감다가도 울어서 무서웠었다. 부모가 우는 걸 보는 것은 정말로 무섭지. 어른들이 유약한 부분을 드러내는 것은 정말로 무서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