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당신께
저녁 9시, 소파에 기대어 리모컨을 쥐고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만난 프로그램이 '우리들의 발라드'였다.
화면 속에서 젊은 가수 지망생들이 무대에 서서, 옛 명곡을 자신만의 색깔로 재해석해 부르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피곤한 하루를 마치고, 각자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TV를 배경 삼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참가자가 부르는 임재범의 '너를 위해'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그 선율이 방 안을 가득 채우자,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제주도에서 올라온 소녀는 택배를 하시던 아버지가 매일아침 자기를 데려다줄 때 차 안에서 항상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고 했다.
순간 그때 그 장면이 오버랩되며 소녀의 노래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건 아마도 전쟁 같은 사랑~ 난 위험하니까 사랑하니까~ 너에게서 떠나 줄 거야"
노래가 끝날 때 패널들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고, 아내의 눈가도 빨갛게 달아올랐다.
순간 스치듯 갑자기 나의 발라드가 떠올랐다.
내 결혼식의 꿈은 내가 축가를 하는 거였다.
어떤 곡을 정할까 몇 주 동안 이곡 저곡을 불러보면서 힘겹게 곡을 정했다.
그중 내 맘을 이끈 것은 폴킴의 '사랑하는 당신께'였다.
<사랑하는 당신께>
사랑하는 당신께
하고픈 말이 있소
잠시 여기 내 옆에 앉아
내 얘기 좀 들어주오
어쩌다 우리가
이리도 가까워지게 됐는지
난 아직도 믿기질 않소
그대는 어찌 생각하오
사랑을 찾아 떠돌던 길에
잠시 머문 줄 알았건만
그대 없인 더는 그릴 수 없는
내일이 올 줄 누가 알았소
내 곁에 잠든 그댈 보면
눈가에 맺히는 그 말
세상 끝에 서게 되더라도
당신을 사랑해
출처 : -폴킴 사랑하는 당신께-
매일 아침 출근길 나는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불렀다.
가사를 외우고, 멜로디를 되뇌며 그녀를 떠올렸다.
퇴근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집에 돌아와 거실 한구석에서 조용히 노래를 연습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음을 맞추며, 나는 다가올 그날을 상상했다.
드디어 결혼식날 당일
아내를 앞에 두고 축가를 부르던 그때를 기억한다.
긴장과 설렘이 뒤섞인 그 순간 나는 무대에 섰다.
아내가 하얀 드레스 자락을 끌며 내 앞에 섰다.
지진이라도 난 듯 떨리는 손길을 가만히 지켜보며 미소를 머금고 나를 향해 웃어 주었다.
가끔 그날의 축가영상을 틀어보면
그날의 숨소리와 현장의 먹먹함이 피부로 느껴진다.
화면 속 내 모습은 어색하지만 진심이 담겨 있다.
그때의 그 발라드는 잊혀지지 않는 '우리들의 발라드'였다.
그건 단순한 노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삶의 고백이자 추억의 재발견이었다.
그때의 얘기를 하니 아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인생이 발라드라면, 우리는 듀엣 가수지.
솔로로 부를 때도 있지만 함께 할 때 더 아름다워. 우린 하나~"
TV 화면 속 참가자가 박수를 받는 장면이 흘러나왔다. 우리도 박수를 쳤다.
우리 자신에게.
그날 밤, 아내와 나는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인생 발라드는 끝나지 않는다.
새로운 가사가 계속 써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들의 발라드'라는 프로그램이 우리에게 준 선물은 잊힌 추억을 깨우는 마법이었다.
삶이 노래처럼 흘러가는 이 순간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멜로디를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