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9시. 대한민국 유부남들이 마트로 모이는 이유

by 젠틀LEE

밤 9시.

TV 소리 너머로 아내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떡국을 먹어야 하는데 재료가 없네?"

소파에 기대어 내일 아침 먹을 떡국과 냉장고 안의 빈자리를 머릿속으로 계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의도를 알아차리고 말했다.

"아, 떡국이 없네. 내가 갔다 올까?"


내 물음에 아내는 "피곤할 텐데 괜찮아"라고 말하지만, 눈은 이미 고마움을 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세한 눈빛으로 내 등뒤를 살포시 떠밀었다.


나는 그 눈빛을 모르는 척하며 대충 외투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사실 나는 알고 있다.

아내가 말한 '떡국'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내일 아침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 집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 부품이라는 것을.


마트의 환한 조명 아래서 나는 비로소 '은밀한 세계'에 입장한다.


마트에 도착하면 기이한 풍경이 펼쳐진다.

밤 9시가 넘은 시각, 대형 마트의 유제품 코너와 신선식품 코너에는 나와 비슷한 차림새의 남자들이 출몰한다.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지 않는다.


하지만 서로가 알고 있다.

저 남자의 손에 들린 대파 한 단과 내 손에 들린 떡 한 팩이, 오늘 밤 우리가 이 차가운 밤공기를 뚫고 나온 '명분'이라는 것을.


카트를 미는 속도는 느릿하고, 시선은 공허하며 정처 없다.

우리는 재료를 고르는 척하며 실은 '평화'를 쇼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쪽 구석에서 마감 세일 중인 맥주 4캔 묶음을 만지작거리는 한 남자를 보았다.

그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우유 샀어. 아, 맥주도 세일하길래 좀 살까?"라고 묻는다.


동의를 구하는 목소리엔 미안함과 기대감이 묘하게 섞여 있다.

나는 괜히 옆에 있는 요플레의 유통기한을 꼼꼼히 확인하는 척하며 주먹을 불끈 쥐며 그를 응원했다.




과일 코너 앞에서 문득 며칠 전 장을 본 기억이 떠올랐다.

정작 본인이 좋아하는 복숭아는 비싸다며 내려놓고, 내가 좋아하는 블루베리만 카트에 담던 당신의 손길.


카트를 밀며 걷는 이 시간은 나에게 '은밀한 반성문'과 같다.

내가 집에서 누리는 당연한 편안함들이 실은 당신의 이런 치열한 고민 끝에 배달된 결과물이라는 걸, 혼자 마트를 걸으며 뒤늦게 깨닫는다.


떡국만 사서 돌아가려다 멈춰 선다.

진열대 구석에서 아내가 평소 즐겨 먹던, 하지만 제 돈 주고는 잘 사지 않던 대용량 요구르트와 젤리하나를 발견했다.

연애할 때는 그렇게 자주 사줬던 것 같은데, 결혼 후엔 '생활'이라는 이름 아래 순위가 뒤로 밀려버린 당신의 취향들.


나는 떡국옆에 그 젤리와 요구르트를 슬쩍 밀어 넣는다.

이것은 오늘 하루 고생한 당신에게 건네는 나의 소심한 '팬레터'다.


남들은 유부남들이 마트에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러 간다고들 하지만, 오늘 밤 나의 외출은 당신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오는 여정에 가깝다.




재료를 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파트 창가에 비친 우리 집 불빛이 따뜻하다.

문을 열자마자 당신은 "왜 이렇게 늦었어?"라고 묻겠지만, 나는 그저 "사람이 좀 많네"라며 젤리와 요구르트가 담긴 봉지를 툭 건넬 것이다.


별일 없는 하루였다.

하지만 그 '별일 없음'을 유지하기 위해 당신이 쏟은 무수한 정성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남편의 은밀한 기록이란, 결국 아내라는 커다란 우주를 관찰하고 기록하는 일이다.


내일 아침, 떡국을 먹으며 아침을 든든하게 시작할 수 있다면 나의 밤외출은 그것으로 충분히 찬란한 기록이 된다.

고맙다는 말 대신, 내일은 내가 조금 더 일찍 일어나 당신의 아침을 열어주어야겠다.

떡국을 너무 좋아하지만 1살은 먹기 싫은 당신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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