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게 참 쉽지 않지, 그래도 팔을 뻗지 않으면 아무 일도 생기지
거실로 배달된 두 개의 ‘폭탄’
시작은 SNS의 짧은 영상 하나였다.
웬 근육질의 남자가 머리에 띠를 두르고는, 고무줄에 매달린 작은 공을 마치 신들린 듯이 때리고 있었다.
'복싱볼'
아내와 나는 그 영상을 보고 호기심이 생겼다.
순간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계속 마트에 가면 그 복싱볼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태풍이 휩슬려 가져간 듯 우리 눈에는 쉽사리 보이지 않았다.
결국, 어느날 아내는 결심한 듯 손가락으로 이미 주문을 하고 있었다.
"좋아! 인터넷으로 사서 해보자고!!"
그것은 다이어트와 스트레스 해소, 그리고 순발력 향상이라는 그럴듯한 수식어를 달고 우리 집 거실로 배달되었다.
하나도 아니고 두개를 주문했다.
나와 아내, 각자의 이마에 하나씩 얹기 위해서였다.
"이거 하면 살 빠진대."
아내는 비장한 표정으로 빨간색 공이 달린 밴드를 머리에 둘렀다.
나도 힘차게 밴드를 감으며 비장한 눈빛을 아내에게 보냈다.
거울 속에 비친 우리 부부의 모습은 흡사 전장에 나가는 전사라기보다는, 웃긴 대학 축제 장기자랑을 준비하는 콤비 같았다.
우리는 서로의 우스꽝스러운 몰골을 보며 한참을 킥킥거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몰랐다.
이 60g짜리 스펀지 공이 우리 부부의 인내심과 코뼈를 얼마나 시험에 들게 할지.
"자, 시작한다!"
호기롭게 첫 주먹을 내뻗은 건 나였다.
하지만 내 주먹이 공을 스치는 찰나, 공은 비웃기라도 하듯 궤도를 틀어 내 오른쪽 눈덩이를 정확히 강타했다.
"악!"
비명이 터졌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내는 "에이, 그것도 못 해?"라며 비웃더니 자신 있게 주먹을 휘둘렀다.
결과는 더 처참했다.
아내가 휘두른 공은 허공을 한 바퀴 크게 돌더니 아내의 정수리를 때리고는 '퍽!'하고 다시 얼굴을 가격했다.
그날 이후 우리 집 거실은 매일 저녁 슬랩스틱 코미디 공연장이 되었다.
‘툭, 퍽, 윽!’ 하는 소리가 리듬감 있게 울려 퍼졌다.
공은 정직했다.
우리가 세게 치면 세게 돌아왔고, 어설프게 치면 더 어설픈 방향으로 튀어 올랐다.
웃긴 건, 그 작은 공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우리 부부의 모습이었다.
아내가 공을 20번 연속 맞히면 내가 박수를 치며 "좀 더!!" 하며 엄지척을 올려주고, 내가 연타를 성공시키면 아내는 "오빠, 방금 좀 록키 같았어"라며 응원해 주었다.
거실 바닥에 땀을 흘리며 주저앉아 서로의 발그레해진 이마를 보고 있자니, 연애 시절 함께 오락실에서 농구를 하던 기억이 났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참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고, 조그만 것에 행복해하는 사람들이었다.
복싱볼을 시작한 지 3일쯤 지났을 때, 나는 깨달았다.
이 운동의 핵심은 공을 강하게 때리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거리 조절'과 '힘 빼기'였다.
공이 돌아오는 길목을 기다리지 않고 욕심껏 주먹을 내지르면 공은 반드시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되어 나를 공격한다.
반대로 너무 겁을 먹고 팔을 뻗지 않으면 공은 맥없이 발치에서 맴돌 뿐이다.
문득 아내와의 관계도 이 복싱볼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 생활이라는 게 그렇다.
때로는 내 마음을 알아달라고 강한 감정의 주먹을 내지르지만, 준비되지 않은 상대에게 던진 강한 말들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내 가슴에 상처로 돌아온다.
반면, 너무 조심스러워 아무런 표현도 하지 않으면 우리 사이의 고무줄은 느슨해져 무미건조한 상태가 되어버린다.
"여보, 이거 진짜 인생 같지 않아? 내가 세게 치면 꼭 내 코를 때리네."
내 말에 아내가 공을 멈추고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그러니까 인생이란 게 참 쉽지 않아, 그래도 팔을 뻗지 않으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아."
그날 밤, 나는 아내의 그 한마디를 곱씹으며 다시 주먹을 쥐었다.
공이 돌아오는 속도에 맞춰 내 리듬을 조절하는 법.
상대가 받아낼 수 있을 만큼의 에너지만을 적절히 실어 보내는 법.
복싱볼은 내게 단순한 운동기구가 아니라, 인생을 알려주는 작은 스승이었다.
어느 날은 유독 회사에서 치여 녹초가 되어 귀가한 날이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어 소파에 파묻혀 있는데, 아내가 슬며시 내 머리에 빨간 복싱볼 밴드를 씌워주었다.
"오늘 한판 해야지? 스트레스 풀어야지."
귀찮다는 내 손을 끌어당겨 억지로 일으킨 아내는 내 앞에서 먼저 공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툭, 툭, 툭.' 경쾌한 소리.
그 리듬에 맞춰 아내의 머리카락이 찰랑거리고,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는 것을 보는데 왠지 모를 울컥함이 올라왔다.
세상 밖에서 얻어맞고 돌아온 나를 위해, 아내는 기꺼이 나와 함께 '자신을 때리는 공' 앞에 서준 것이다.
나는 천천히 주먹을 들어 올렸다.
내 안의 응어리진 마음을 공에 담아 보냈다.
처음엔 거칠던 주먹질이 시간이 지날수록 부드러워졌다.
아내와 나, 두 개의 공이 만드는 불규칙한 박자가 거실을 가득 채웠다.
우리는 한마디 말도 섞지 않았지만, 서로의 숨소리로 대화하고 있었다.
'괜찮아, 오늘 하루도 고생했어. 자, 다시 리듬을 찾아보자.'라고 서로를 다독이는 것 같았다.
10분 남짓한 시간 동안 흠뻑 땀을 흘리고 나니, 신기하게도 마음속 무거웠던 돌덩이가 조금은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운동이 끝나고 아내는 짧게 한마디 건넸다.
"오늘 하루 너무 수고했어요~ 우리남편"
그 말 한마디에 그날의 설움이 강물에 쓸려가듯 사라져갔다.
이제 우리 집 거실 탁자에는 두 개의 복싱볼 밴드가 나란히 놓여 있다.
가끔 손님이 오면 "이게 뭐냐"며 웃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이것은 단순한 장난감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에게 맞추기 위해 노력하는 '튜닝기' 같은 존재다.
현재 아내의 꿈은 복싱볼을 누워서 직선으로 계속 하는것이다.
프로가 될때까지 그녀의 도전은 멈추지 않을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공에 눈을 찔리기도 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나가는 공 때문에 당황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공이 나를 때리는 건 내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단지 지금 리듬이 조금 어긋났을 뿐이라는 걸.
그리고 그 리듬은 언제든 다시 맞추면 된다는 걸 말이다.
아내와 나 사이에는 투명한 고무줄이 연결되어 있다.
때로는 팽팽하게 긴장되기도 하고, 때로는 느슨하게 처지기도 하는 그 줄을 붙잡고 우리는 매일 연습한다.
너무 세지도 않게, 그렇다고 너무 약하지도 않게 서로의 박자에 맞춰 삶이라는 공을 주고받는 법을.
우리는 오늘도 그렇게 서로의 리듬을 응원하며 60g짜리 행복을 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