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의 서열화

당신의 취향은 몇등 인가요?

by 젠틀LEE


우리는 오늘도 무언가를 감탄하기 위해 산다.


길가에 핀 이름 모를 들꽃의 생명력에, 우연히 들어간 식당의 정갈한 밑반찬에, 혹은 주말 오후를 채워주는 저렴하지만 입에 착 감기는 커피 한 잔에 우리는 "와, 좋다!"라는 짧은 탄성을 내뱉는다.

이 탄성은 세상을 향한 가장 순수하고도 무해한 나만의 고백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고백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기운을 단칼에 베어버리는 이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타인의 감탄을 '더 높은 단계'를 경험하지 못한 자의 무지로 치부해 버린다.


어느 날, 당신이 평소 가보고 싶었던 동네 파스타집에서 만족스러운 식사를 했다.
기분 좋게 SNS에 사진을 올리거나 친구에게 "여기 정말 맛있다"라고 말한다.
이때 한 친구가 다가와 이렇게 말한다.


"거기? 네가 아직 A호텔 레스토랑을 안 가봐서 그래.
거기 먹어보면 여기는 못 먹지."


이 말은 겉으로 보기에 '더 좋은 정보'를 제공하는 조언 같지만, 본질은 상대의 현재 경험을 '열등한 것'으로 격하하는 공격이다.

누구나 한 번쯤 이러한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그들에게 세상은 일직선상의 계단이며, 모든 경험은 1등부터 꼴찌까지 줄을 세워야 하는 숙제와 같다.

이들은 타인의 기쁨에 공감하기보다, 자신이 그보다 '상위 레벨'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키며 자신의 우월감을 확인하려 든다.


하지만 가장 큰 비극은 '나만의 기준'이 없다는 점이다.
이들이 신봉하는 '레벨'은 대개 스스로 정의한 것이 아니라 가격표, 인기맛집, 권위 있는 순위표나 소위 말하는 '브랜드 평판'에 의존한다.

음악의 선율이 주는 위로보다, 연주자의 스펙과 공연장의 등급을 따지는 것과 같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가 아니라, 남들이 무엇을 '최고'라고 부르는지에 목을 매다 보니 이들의 취향은 타인의 시선에 저당 잡혀 있다.

10만 원짜리 와인에서 1만 원의 가치도 못 느끼면서도, 그것이 비싸다는 이유만으로 "역시 다르다"라고 말하는 공허한 연극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제일 큰 문제는 '상대의 기분을 잡치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기분의 문제를 넘어선다.

타인의 감탄을 조롱하거나 깎아내리는 문화가 정착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소박한 발견을 공유하려 하지 않는다.

"혹시 내가 이걸 좋다고 했다가 '수준 낮다'는 소리를 들으면 어쩌지?"라는 검열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취향은 서열이 아니라 그 자체여야 한다.

누군가에게는 편의점의 1,500원짜리 얼음 컵 커피가 세상에서 가장 시원한 축복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수십만 원짜리 스페셜티 커피가 인생의 낙일 수 있다.

이 두 경험은 서로 다른 평면에 존재할 뿐,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부정할 권리는 없다.
진정으로 높은 수준의 경험을 해본 사람일수록 타인의 작은 감탄을 소중히 여긴다.

그 기쁨이 나에게 어떤 동력인지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기? 네가 A호텔 레스토랑을 안 가봐서 그래"라고 말하는 대신, "오, 거기 좋지! 네가 거기서 행복했다니 나도 좀 소개해줘"라고 말할 줄 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월감의 방향이 아니다.

자신이 느낀 사소한 감정의 결을 스스로 믿어주는 연습, 그리고 타인이 내뱉은 탄성의 온도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공감의 근육이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타인보다 높은 계단에 올라서는 우월감이 아니라, 매일 마주하는 일상의 조각들에서 기꺼이 감탄할 수 있는 그 말랑말랑한 마음이다.

"식사하셨어요?"라는 평범한 안부에 "커피 마시고 있으니 밥 먹은 거겠죠?"라고 되묻는 냉소보다는, 그저 맛있게 먹은 밥 한 끼의 온기를 나누는 다정함이 우리를 더 '높은 수준'의 인간으로 만든다.


오늘도 말한다.

'내 취향을 그냥 존중해 줘'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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