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장 수중에 돈이 없어도 뭐든지 살 수 있다. 신용카드가 있으니까.
다음 달에 갚아야 할 빚이라는 거, 나도 안다.
그래서 꼭 필요한 것만 산다. 너무 비싸서 부담이 되면, 무이자할부도 이용할 수 있다.
나는 사치나 낭비, 과소비 같은 건 안 하는 사람이다.
근데 잠깐만. 카드값이 왜 이래??
20대 때부터 나는 카드값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진짜 필요한 소비만 하는데도 이상하게 자꾸만 월급만큼의 카드값이 나오는 거였다.
내가 무슨 백화점에서 비싼 옷, 가방, 신발, 화장품을 사서 쓰는 것도 아니고, 해외여행을 다닌 것도 아닌데.
언제나 합리적인 소비를 하며 알뜰살뜰 사는 거 같은데, 도대체 왜지??
미스터리 같지만, 엄연한 현실이었다. 카드 내역을 보면 하나하나 다 내가 쓴 게 맞는데. 이것들이 쌓여서 이 금액이라고?
올리브영. 던킨도너츠. 친구와의 술자리. 남자친구랑 데이트... 자잘한 지출들이 쌓여 어느새 월급을 훌쩍 넘겼다.
월급이 들어오면 카드값부터 갚고, 그러고 나면 현금이 없으니 다시 신용카드를 쓰는 악순환의 반복이 시작됐다.
한참 유행하던(?!) 카드 돌려 막기 대신 내가 선택한 건 '리볼빙'이었다.
카드명세서에는 '최소 결제 금액'이라고 쓰여 있었다.
'응? 최소 결제금액? 이건 뭐야?? 이번 달에 이만큼만 내면 된다고?? 꿀인데? 다음 달에는 진짜 좀 아껴 쓰고 갚으면 되겠지.' 그렇게 시작했다.
한 번 리볼빙을 쓰고 나니 그걸 갚는 건 또 어려웠다.
내 카드 명세서에는 ‘전월 이월 금액 + 이번 달 결제 금액 + 이자’가 함께 떠 있었다. 갚아보려고 해도 100만 원 정도의 이월금이 계속 붙어있었다.
그때는 리볼빙 이자가 그렇게 높은지도 몰랐다.
'아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넘겨온 카드 리볼빙 빚은, 결혼 후 남편이 정리해 줬다.
진짜로 어떻게든 해결이 되어버렸다. 빚은 해결됐지만, 내가 배운 건 없었다.
그냥 '다행이다' 하고 넘겼고, 나는 또 변함없는 태도로 살았다.
15년이 흘렀다.
많은 일이 있었고, 나는 40대가 되었다.
나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고, 상황은 더 나빠졌다.
신용카드도 감당 못하던 내가 마이너스 통장까지 손에 넣었으니, 돈이 없어도 쓸 수 있는 ‘무기’가 두 개로 늘어난 셈이다.
악순환의 늪이다.
돈 관련 책을 보면 언제나 강조하는 게 '신용카드 없애라'인데, 그게 진짜 쉽지가 않다.
쓸 돈이 없어도 결제할 수 있다는 그 '마법'에 너무나 오랫동안 익숙해졌다.
나는 이미 신용카드에 쩔어있다.
지금 이 상태에서 신용카드를 없애면 마통 잔액만 늘어날 거 같다...
돈을 모으지 못하는 이유. 적자 가계부와 마이너스통장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수입보다 지출이 많기 때문이다.
40대에 이렇게 적자인생을 살게 된 굵직한 이유들은 몇 개 있지만,
잘못된 소비습관과 돈에 대한 무심한 태도가 기본으로 깔려있다는 것이 근본적인 원인인 것 같다.
수입이 부족한 것도 문제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버는 것보다 더 쓰는' 습관이다.
돈이 있으면 써 버리고, 없어도 써 버리는 소비 습관.
그것이 나의 일상이었다.
필요한 것만 산다고 생각하지만,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생각 없이 타는 택시, 습관처럼 사 먹는 간식,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보내는 선물 등등... 안 써도 되는 돈들을 쓰고 있다.
월급은 언제나 충분하지 않다.
예산을 세워서 계획적으로 쓰려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오버해서 나가는 돈도 어쩔 수 없이 너무 많다.
예기치 않은 수리비, 경조사비, 병원비...
‘다음 달에는 좀 더 잘해봐야지’ 하고 다짐하지만, 이미 마이너스로 잔액이 넘어온 상황이고, 악순환은 반복된다.
어디에서 잘못된 걸까?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하지??
돈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답답한 마음만 커진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자꾸만 현실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내 탓이 아니다’, ‘운이 없었을 뿐이다’ 하며 변명하고, 문제를 직면하는 대신 애써 눈을 돌렸다.
돈에 대한 솔직한 마주침이 두려웠지만, 그것이 변화를 시작하는 첫걸음임을 이제는 조금씩 알게 되었다.
돈 없다는 말은 하면 안 되는 줄 알았다. 돈 없다는 말은 부끄러운 말이었다. 나도 남들만큼은 산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 ‘남들’이 누구인지도, 누구에게 그걸 보여주고 싶은지도 모르겠지만.
가진 돈이 없으면서도 있는 척, 괜찮은 척하며 신용카드를 긁어댄 이유는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서였다.
쪼들린다, 빠듯하다, 마이너스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그들'이 나를 무시할 것 같았고, 내가 너무 불쌍해 보일 것 같았다.
내 사정을 솔직하게 말하지 않고, 늘 괜찮은 척, 여유 있는 척했다.
감추면 괜찮아지는 줄 알았고, 언젠가는 나아지겠지 싶었다.
하지만 감춘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돈이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에 맞게 살아야 한다.
40대 중반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이대로는 정말 안된다.
지출 기록용으로만 쓰던 가계부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매일, 매주, 매월 시간을 내서 지출 내역을 확인하고, 깜짝 놀라고, 개선 방안을 모색한다.
'이게 정말 필요한가?' 생각해 보는 습관을 들이려고 한다.
아들에게도 빠듯한 가정 경제 상황을 얘기했다.
없는 건 없다고 말하고,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된다.
신용카드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삶으로 천천히 나아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