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 뒷벽 성적 게시판 앞에서 아이들의 함성이 터졌다. 평소라면 당연했을 이름의 위치가 바뀌어 있었다.
"와, 대박! 서준아, 네가 진짜 1등이야?"
아이들의 시선이 서준에게 쏠렸다. 서준은 떨리는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드디어 넘지 못할 벽 같았던 민우를 밀어냈다. 그때, 민우가 인파를 헤치고 다가와 서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서준아, 진짜 축하해. 너 이번에 정말 열심히 하더니 결국 해냈구나."
민우는 잠시 게시판을 응시했다. 당황이나 충격으로 눈동자가 흔들릴 법도 했지만, 그저 차분하게 자신의 이름을 확인했을 뿐이다. 민우가 고개를 돌려 서준을 보았을 때, 그의 얼굴에는 옅고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가늘게 위로 올라간 입꼬리와 선한 눈매는, 마치 오랫동안 간직해 온 귀한 물건을 아끼는 친구에게 기꺼이 내어주는 사람의 표정 같았다.
서준은 민우의 표정을 샅샅이 훑었다. 축하의 말 뒤에 숨겨진 '분노'와 '질투'를 찾아내려 애썼지만, 민우의 눈동자는 잔물결 하나 없는 새벽의 호수처럼 투명했다. 민우는 서준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게시판을 함께 바라보며 다시 한번 말했다.
"정말 멋지다, 마서준."
그 말은 서준의 심장을 성취감으로 채워주는 대신, 오히려 민우의 배려라는 틀 안에 가두어 버려렸다. 아이들은 여전히 빛나는 민우의 의연함을 보며, 1등 성적표를 쥔 서준보다 민우를 훨씬 존귀한 존재로 우러러보고 있었다. 억지로 지어낸 기색조차 없는 진심 어린 말투, 서준은 그 결점 없는 태도에 화가 치밀었다.
"야, 성민우! 다음에 다시 1등 하면 되지."
"맞아, 우리 마음속 1등은 너다!"
아이들은 평소처럼 민우를 에워싸고 장난스레 그를 이끌며 급식실로 향했다. 1등의 이름표는 서준이 가졌지만, 교실의 온기는 민우를 향해 흐르고 있었다.
[급식실: 그림자의 태동]
서준은 평소처럼 구석 자리에 앉아 수저를 들었다. 식판 너머 민우 주변에는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깔깔대며 반찬을 나눠 먹고 있었다. 그때, 옆 테이블 아이들의 대화가 서준의 귀에 날카롭게 박혔다.
"아, 맞다. 어제 그 톡방에 올라온 짤 봤어? 민우 표정 진짜 웃기던데."
"봤지! 민우가 자기 이번에 수학 망했다고 자학하는 거 보고 진짜 뿜었잖아."
"야, 근데 우리 오늘 피씨방 가는 거 확정이지? 아까 공지에 투표 올렸는데 민우만 아직 안 했더라."
민우가 입가에 묻은 양념을 닦으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아, 미안. 지금 누를게. 야 근데 오늘 태우가 쏜다며?"
서준이는 씹고 입던 밥알이 모래알처럼 까슬하게 느껴졌다. 공지? 투표? 그들이 말하는 세상은 서준이 아는 학교와는 다른 차원의 공간 같았다. 서준은 자신의 핸드폰 화면을 켰다. 알림창은 고요했다. 1등이 되면 세상의 중심이 될 줄 알았는데.
'왜? 내가 1등인데. 이제 내가 너보다 위인데. 왜 너희는 아직도 저 녀석 곁에만 있는거야?'
민우를 중심으로 터져 나오는 아이들의 활기찬 소라함이 눈부실수록, 그 빛에 닿지 못한 서준의 그늘은 발밑으로 더욱 시커멓게 웅크리며 깊어졌다. 1등이라는 성적표는 그에게 왕관이 아닌,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완벽하게 가로막아버린 높은 벽이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급식실의 천장을 울릴 때마다 서준의 그림자는 기괴할 만큼 길게 늘어져 민우의 발꿈치 근처를 기웃거렸다. 빛의 세례를 받는 자들의 온기가 서준의 식탁 앞에서 거짓말처럼 툭 끊겼다. 그 끊어진 경계선 위로 정체 모를 어두운 얼룩이 서서히 번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가슴 깊은 곳에서 녹검색 끈적한 무언가 꿈틀거리며 올라왔다. 서준의 그림자가 급식실 바닥의 얼룩처럼 길게 늘어지며, 민우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소리 없이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