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건드리면 다 먹어버릴 수 있겠어."
서준의 머릿속에서 낮고 축축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젖은 흙바닥을 기어가는 듯한 기분 나쁜 속삭임이었다.
"넌 누구야?"
"나는 너의 부정적인 감정을 씨앗으로 삼고 자라지. 네가 누군가를 증오하고 스스로를 비하할 때, 나는 네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린다. 나를 태어나게 해줘서 고맙다."
서준은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 눈동자 깊은 곳에는 녹검색 액체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부정적인 감정을 좀 먹는다고?"
"그래. 네가 느꼈던 그 지독한 소외감. 1등을 하고도 채워지지 않는 너의 그 비참한 구멍이 나를 키웠지. 이제 너는 혼자가 아니야."
서준은 의지와는 상관없이 기괴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방법은 간단해. 네가 느끼는 이 감정을 친구들에게 친절하게 나눠주는 거야. 네 친구들은 살짝만 건드려도 그 안에 숨겨둔 오물들이 터져 나올 만큼 위태롭거든. 내가 그 틈으로 파고들 수 있게 아주 작은 틈만 열어줘."
그것은 서준이라는 껍데기를 통해 세상을 먹어 치우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준은 상관없었다. 누가 제물이 되든, 이 속 뒤집히는 현실을 부술 수만 있다면 말이다.
다음 날, 서준은 평소보다 더 차분한 표정으로 교실 문을 열었다. 그의 입꼬리는 어제보다 더 길게 찢어져 있었다. 서준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민우 곁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지혜였다. 평소 거울 보는 것을 좋아하고 남의 시선에 유독 민감한 아이.
서준은 지혜의 책상 옆을 스쳐 지나가며, 아주 작지만 그녀만 들릴 수 있도록 선명하게 속삭였다.
"지혜야, 너 요즘 피부가 예전 같지 않은거 같아."
지혜는 거울 보는걸 멈추면서 예민하게 굴었다.
‘네가 무슨 상관이야. 내 피부가 어떻든 무슨 상관이냐고…’
책상 위에 놓았던 거울을 다시 보면서 히스테릭한 목소리로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는 순간에 녹색 연기가 바닥에서 흘러 들어와 그녀의 몸을 감싸안았다.
그녀 내면에 숨겨져 있던 열등감이 녹검은 지렁이를 먹고 자라나 스스로 내뱉는 독설이었다.
서준은 자리에 앉아 히죽거리며 지혜를 힐끔 바라봤다. 주변을 돌아보니 녹색연기가 자욱하게 깔린다.
서준은 낮게 읊조렸다.
'봐, 여기는 조금만 건드려도 다 먹어버릴 수 있겠어.'
‘이제 우리 세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