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다 끝이 나지 않겠어. 이걸로는 안되겠어."
서준을 주시하던 김씨는 무언가 가늠하듯 눈가를 찌푸리며 흩어진 생각을 하나로 모으려 애썼다. 김씨는 눈매를 날카롭게 가다듬으며 서준의 미세한 떨림을 쫓았다. 그러자 서준의 등 뒤로 허공이 일렁이며 화경이 펼쳐졌다.
식탁 위의 풍경이 보인다. 일정한 간격으로 놓인 세 개의 그릇과 수저.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국물조차 이 집의 냉기 앞에서는 금세 식어버릴 것만 같았다. 서준은 교복 안주머니에서 조심스레 성적표를 꺼내 밀었다. 늘 보던 숫자 '2'대신 '1'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아버지는 국을 한 술 뜨고 나서야 무심하게 종이를 훑었다.
"당연한 걸 이제야 했구나. 고생했다는 말은 대학 합격 통지서를 받은 뒤에 나누도록 하자."
그 차가운 선언에 서준의 입안에 담긴 밥알은 모래알처럼 껄끄러워졌다. 씹어도 씹어도 삼켜지지 않는 음식물을 머금은 채, 서준은 생각했다. 명망 높은 교수인 아버지와 완벽주의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는 오직 '오차 없는 결과물'로만 증명될 수 있다는 것을. 칭찬 한마디 없는 식탁 위로 서늘한 외로움이 물들었다.
거실은 모델하우스의 쇼룸처럼 지독하게 매끄러웠다. 누구의 손때도, 온기고 허락하지 않는 그 공간은 사람이 사는 집이라기 보다 박제된 박물관에 가까웠다. 하얀 소파는 주름 하나 없이 팽팽했고, 그 앞의 대리석 테이블은 지문 하나, 먼지 한 톨 앉아 있지 않았다. 형광등 빛을 정직하게 반사하는 대리석의 표면은 집안의 서늘한 공기를 대변하듯 서늘하게 빛났다. 테이블 위에는 리모컨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생활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거실이었다. 벽면에 걸린 시계는 초침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숨소리마저 목구멍 안으로 집어 삼켜야 할 것 같은 정적 속에서 서준은 자신의 심장 소리가 유독 소란스럽게 느껴져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먼지 한 톨 허용하지 않는 결벽에 가까운 공기는 서준의 숨통을 서서히 조여왔다.
"이거였구나. 바로 이거였어."
김 씨는 서준의 등 뒤로 일렁이는 차가운 화경을 응시하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 박제된 집구석이 소년의 영혼을 어떻게 갉아먹었는지 김 씨는 정확히 읽어냈다.
"이제는 내가 움직일 차례야."
김 씨의 팔목에 새겨진 타투가 비늘처럼 들뜨며 주황색 빛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김 씨가 서준을 거칠게 끌어안자, 학원 건물의 서늘한 그림자를 찢고 거대한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김 씨의 팔목에서 시작된 주황빛은 거대한 해일이 되어 학원가의 차가운 불빛을 집어삼켰다. 폭발적인 굉음과 함께 서준을 옥죄던 지렁이의 몸체가 따뜻한 마음에 녹아내렸다. 김 씨의 두 팔이 학생 서준을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괜찮아. 서준아. 이제 그만 해. 숨을 크게 쉬어봐."
서준이는 김 씨에게서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달큰한 온기가 서준의 교복 안으로 밀려들었다. 2등에서 1등을 했지만 만족하지 못했던 소년의 가슴 안에서 무언가 툭하고 녹아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널 만든건 나니깐...'
'너는 내가 원하는 것이 뭔지...'
'두려워 하는게 뭔지...'
'나만큼 잘알겠지...'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서준의 목줄기를 파먹던 검푸른 지렁이가 김 씨의 뜨거운 사랑의 기운에 데인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녹아져 내렸다. 서준의 등 뒤로 김 씨의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전해지자, 서준은 태어나 처음으로 숨통이 트이는 기분을 느끼며 김 씨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차가운 도시의 소음이 멀어지고, 서준은 누군가의 품 안에서 무너져 내리는 법을 배웠다. 어린 아이처럼 서준은 엉엉 울기 시작했다. 서준의 등을 토닥이는 김 씨의 투박한 손길을 따라, 억눌러온 숨이 뜨거운 울음이 되어 터져나온 것이다. 김 씨는 서준을 품에 더 깊숙이 끌어안으며, 떨리는 소년의 귓가에 낮고 묵직한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네 잘못이 아니야, 서준아."
지렁이가 빠져나간 자리에 차가운 공기 대신 김 씨의 진심 어린 숨결이 채워졌다. 서준의 어깨가 들썩이자 김 씨는 투박한 손으로 소년을 다독였다.
"미안하다. 어른들이 이런 세상을 만들어서. 네가 당연히 누려야 했을 그 평범한 하루를, 진작 선물하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그제야 서준은 참아왔던 울음을 터트렸다. 비로소 열일곱 소년으로 돌아온 순간이었다. 김 씨의 팔목 타투는 서준의 팔목으로 옮겨 가면서 서준은 비로서 잠식된 지렁이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폭발적인 주황빛이 휩쓸고 간 학원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기괴할 정도로 평온한 일상의 질서를 되찾았다. 밤공기의 비릿한 냄새와 퇴근길 자동차들이 내뿜는 미지근한 소음이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려는 시작의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