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인 듯 내 것이 아닌 것들에 대하여
책을 읽다가 카드 지갑을 잃어버렸다.
얼마나 책에 집중한 것인지, 지하철에서 내릴 때 카드지갑을 바닥에 떨어뜨리고서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냥 난 책에 빠져들었다. 셰익스피어의 <한 여름밤의 꿈>. 누구나 이름만 들으면 알 수 있는 고전. 중학교 때부터 책꽂이에 무심하게 꽂아져 있었지만, 읽지 않았다. 언젠가는 읽어야지 미루고 미루다 책장 한 번 넘기지 못했다.
우리 집엔 세계명작 100권 전집이 나란히 책장 두 칸을 차지하고 있었다. 책이 이렇게 많아진 이유는 동생 덕분이었다. 동생은 책을 팔러 온 아줌마를 거절하지 못했고, 부모님에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덜컥 계약을 해버렸다. 그 덕에 나는 읽고 싶었던 책을 몇 권 골라 읽었지만 셰익스피어의 소설은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극본 식으로 구성된 게 뭔가 이질감이 느껴져서였다. 그냥 가식 같았다. 꾸며진 글.
<한 여름밤의 꿈>은 희극이다. 남녀의 사랑을 다룬 이야기로 내게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건 '사랑은 덧없는 환상'이라는 메시지를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죽을 듯 사랑했던 남녀는 부모님의 반대에 힘든 결심을 하고 결국 삶의 터전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려한다. 가는 길이 멀어, 잠시 눈을 붙인 사이 심술궂은 요정이 남자의 눈에 사랑의 묘약을 뿌리게 되고, 남자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 그토록 목숨을 걸어 사랑했던 여자를 두고 딴 여자에게 홀린 남자는 눈이 멀어 다른 여자에게 사랑을 구애한다.
빛나는 것들은 이처럼 너무 빨리 소멸해.
사랑은 저급하고 천하며 볼품없는 것들을 가치 있는 형체로 바꿔 놓을 수 있어. 사랑은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는 거야. 그래서 날개 달리 큐핏을 장님으로 그려놨지.
결국 눈에 뿌린 묘약의 해독제를 다시 뿌려 다시 본래의 마음을 되찾긴 하지만, 사랑은 그저 꿈처럼 잡을 수 없이 잠깐 왔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사랑은 그런 신의 장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한 여름밤의 짧은 꿈처럼 겨우 묘약 하나에 이 여자를 사랑할지도, 저 여자를 사랑할지도 모를.
어쩌면 사랑이란 감정은 가질 수 없는 것일까.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면 이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싶다가도 그 감정은 유효기간이 있는 짧은 허상임을 알아채고 만다. 영원한 건 세상에 없다. 그저 지키고자 하는 책임감만 따를 뿐. 그리고 그 책임감이라도 있는 사람에게 우리는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붙인곤 한다.
눈의 기능 앗아가는 어두운 밤이면 귀가 가진 인지력은 더욱 예민해진다. 그래서 밤이 되면 시력은 줄지만 그 두 배의 보상을 청력이 받는 거야.
사랑이 떠미는데 왜 머물러 있어야 하지?... 확실히 해! 이건 최고 진실이고 농담 아냐. 너를 진짜 미워하고 헬레나를 사랑해.
하룻밤 사이에 변심한 애인. 아무리 요정의 꾀에 넘어갔다고 하더라도 마음이란 것은 이렇게 쉽게 변할 수 있는 것일까. 한 여름밤의 뜨거운 열기처럼 잠시 더운 마음이었다가 다시 차갑게 식어버리고 마는 것. 그것이 우리가 그렇게 애써 갖고 싶어 하는 사랑의 실체가 아닌가 싶다.
내 사랑은 좀 특별할 것이라는 생각은... 마라.
그 어디에도 특별한 사랑은 없다. 애써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당신일 뿐. 우리 모두가 그 특별함에 녹아들고 싶어 잠시 환상에 빠져들었다가 호되게 상처를 입고 만다.
언젠가 사랑에 상처 입은 내게 누군가 다가와서 말해주었다. "속는 건 바보가 아니에요. 속이는 사람이 나쁜 거지." 그 말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던가.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누군갈 만나도 계속해서 난 속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상대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어쩌면 우리는 나라는 사람 위주로 돌아가는 세상에 착각이라는 법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개똥철학 하나를 품고 누군가 내 세상에 들어오게 되면 나 같지 않음에 분노하고 슬퍼한다. 나 같은 사람은 애당초에 없는 것을, 왜 반복해서 자꾸 똑같은 실수로 마음을 다치게 하는 것일까. 도대체 우린 무엇을 기다리고 무엇을 믿는 것일까.
<한 여름밤의 꿈>은 그냥 가볍고도 편하게 읽기 좋은 책이었다. 특히 길고 긴 여름밤에 읽으면 더 넓은 상상의 세계를 펼쳐나갈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든다. 책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정작 내 카드지갑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했네...
사실 요즘 자주 물건을 잃어버린다. 특히 카드지갑은 처음 잃어버린 게 아니다. 난 카드지갑 안에 두 장의 카드와 명함 따위를 넣고 다니는데, 전에도 한 번 잃어버렸다가 찾았다. 그 잃어버린 기간 동안 걱정이 되어서 카드를 정지하고 새 카드로 발급받긴 했지만, 한 달이 안돼서 다시 이렇게 카드지갑을 잃어버리고 카드 정지 신청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이 참 한심하게 느껴졌다. 모두 지하철에서 <한 여름밤의 꿈>을 읽다가 정신이 팔려서 펼쳐진 일.
이미 카드는 정지 신청을 했는데, 어떤 한 남자에게 연락이 왔다. "ooo 씨죠? 카드지갑 제가 가지고 있어요. ooooo역 관리실에 맡기고 갈게요." 다행인가 싶다가도 조금만 빨리 연락을 주지 싶었다. 정지한 카드사에 연락해 다시 카드를 찾았다고 처리하는 과정은 왜 이리도 복잡한 건지, 10분을 넘게 통화한 것 같다. 카드 정지를 해지하는데만. 그 남자가 카드지갑을 맡겨 놓았다던 역으로 가서 지갑을 찾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왜 이리도 또 멀게만 느껴지는 것인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모바일 커피 쿠폰을 보내며, 참 나도 정신없는 인간임을 또 한 번 느끼게 된다.
그리고 가벼운 말 한마디라도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음을, 아니... 차라리 누군가가 고운 말을 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보다 내가 상처 받지 않을 마음을 장착하는 것이 더 빠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선배에게 "난 불행해요"라고 말했더니, "내가 더 불행해"라는 답이 돌아온다.
엄마에게 "엄마, 그 사람이 날 사랑하지 않는대"라고 말했더니, "사랑은 없는 거야"라고 다독인다.
선배나 엄마의 말이 이처럼 위로가 된 적이 없었다. "별거 없어. 다 그렇게 살아"라고 쿨하게 말하는 그 사람들의 마음에는 얼마나 많은 돌덩어리가 내려앉아 있을까 싶어서 아프기도 했다. 산다는 것은 이처럼 아픔을 견뎌야 하는 일이다. 모든 것들이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아마도 나이를 먹으면 더 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모든 것들이 이유 있게 느껴질 때 그제야 내가 진정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