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임을 다 한다는 것에 대해

날 위해 최선을 다하던 너였는데, 나는 채찍질만 해댔구나.

by 김효정

"배터리 수명이 다했네요."

서비스 센터 직원이 말했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난 조금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보통 배터리 수명이 몇 년이에요?"


"쓰는 사람에 따라 다르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구입한 지 2년도 채 안돼서 약정기간이 아직도 몇 달이나 남은 이 폰을 얼마나 아낌없이 써댔다는 건가.

"새 걸로 교체하는데 드는 비용은 10만 9천 원 이예요. 해드릴까요?"

생각보다 많은 비용에 살짝 당황스러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꺼져버리는 폰을 한 달을 사용해왔는데, 더는 미룰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네, 교체해주세요."

"백업은 해 놓으셨나요? 폰에 있는 데이터가 다 지워질 수도 있어서."


꼼꼼한 성격이 못돼서 폰에 뭐가 들어 있는지도 모르는 내가 백업을 해 놓을 리가 있나.

"아니요. 그래도 괜찮아요. 중요한 건 없어서."

배터리 교체를 하는데 십여분을 기다리며,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 노랗게 물들어 있는 은행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바람이 불었는지, 가지 끝에 매달린 은행잎 한 장이 댕강댕강 매달려 흔들거리다가 고요하게 떨어졌다. 쓰임을 다한 은행잎은 그렇게 차가운 바닥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이 세상에서 쓰임을 다 한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쓰임을 다 한다는 것은 '쓸모없는 존재'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요즘들어 생이 참 길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생이 이렇게 긴 이유는, 할 일이 너무 많다는 것.

어떻게 살아도 내 인생이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소신있게 사는 것에 의미가 더해진다. 대부분 의미있는 것들에는 희생이 따른다. 세상에 필요한 존재로 남기 위해서는 희생을 피할 수 없다.


"쓸모 있는 존재가 되려면, 무언가가 되어야해."

"무엇이 될 수 있는데요?"

"너는 한 남자의 아내가 될 수 있고, 엄마가 될 수 있고, 할머니가 될 수 있어. 더 많은 것도 될 수 있지만, 평범하게는 그래."


세상에 쓸모가 없어지면 먼지처럼 그냥 사라져 버리고 싶다는 내 생각에 "왜?"라는 반박을 던진 아이에게 나는 말했다.

"살면서 먼지 같은 존재로 남긴 싫어. 누구에게든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어."


나는 언제까지 쓸모 있을까. 누구에게든 언제까지 필요한 존재가 될까. 언젠가 내가 원하는 때 바람처럼 내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하겠지만, 쉬운일은 아니다.


변하기 싫고 지금 여기 머물러야 하는 나와, 변해야 하는 상황이 슬프지만, 겁쟁이같은 어린애로 평생 살 수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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