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타인이 우산을 씌워줄 확률
회사를 나서는데 보슬비가 내렸다.
"선배, 우산 가지고 가세요."
나를 챙기는 그녀들의 귀여운 모습에 웃음이 났다.
"괜찮아, 이 정도 비야 그냥 맞지 뭐."
"많이 내릴 것 같은데요."
"지하철에서 내려서 잠깐 걸으면 되는걸, 더와도 뭐, 괜찮아."
"이렇게 비 오는 날, 로맨스는 시작되는 법이죠. 낯선 남자가 우산을 씌워주면서."
현실에서 잘 생기지않을 일을 상상하며 설레여 하는 건, 여자가 가진 특권이다.
퇴근길 떠들썩한 나와 그녀들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내리는 빗방울을 타고 땅바닥으로 가볍게 떨어졌다.
힘겨운 하루의 끝을 좋은 사람들과 마무리한다는 것만으로도 가벼운 발걸음.
바쁜 날이 계속 이어지면서, 책을 읽지도, 글을 쓰지도 못하는 내가 안타까워 지하철에서 휴대폰의 작은 키패드를 눌러가며 수필을 썼다. 퇴근길 쓰는 글은 뭔가 맛있는 공짜 음식을 얻어먹은 듯한 느낌이 든다. 한남동에서 양평동까지 오는 내내 쓸 수 있는 글은 한정적이지만, 시간을 벌었다는 생각으로 뿌듯해진다. 그렇게 내 정신은 온통 휴대폰으로 쓰는 글에 빠져있었다.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 계단을 올라 입구로 나간 순간, 후배들 말을 들을 걸 싶을 정도로 비가 꽤 많이 내리고 있었다.
후회도 잠시, 나는 늘 그랬던 것처럼 씩씩하게 비 오는 거리로 뛰쳐나갔다. 지하철에서 가장 가까운 버스 정류장까지 달려 잠시 비를 피했다. 다시 철물점 처마 밑까지 뛰었다. 긴 머리카락이 촉촉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한번 뛰려고 하던 찰나, 머리 위로 우산이 드리워졌다.
"같이 쓰실래요?"
'뭐지? 이건...' 당황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잠시 멈칫했다.
"바쁘게 뛰어가시길래, 급한 일 있으신가 해서요. 제가 가는 길까지 같이 쓰고 가요."
조금은 망설여졌지만, 선해 보이는 인상에 잠깐 얻어써도 괜찮겠다 싶었다.
"네... 그럼 가시는 길 까지만 쓸게요. 감사합니다."
영화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 일어...났다. 근데 이 남자, 목소리가 참 좋네.
"그냥 불편하시면, 아무 말 안 하고 그냥 걸으셔도 돼요. 부담 갖지 마세요."
"네에..."
몇 초간의 짧은 침묵이 이어지고 미안한 마음에 나는 입을 연다.
"어디 가시는 길이세요? 저랑 같은 방향인 거 맞죠? 얻어 써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아, 장례식장 가는 길인데 저도 방향을 잘 모르겠네요. 이 동네는 처음이라서요."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다 또 한 번 침묵이 흐른다.
"이제 가셔도 돼요. 집 거의 다 왔어요."
"장례식장에 몇 시까지 가기로 약속되어 있는 게 아니라서, 저 시간 많아요. 괜찮아요. 그런데 퇴근하시는 길인가 봐요?"
"네, 퇴근하는 중이에요."
"퇴근길이시죠?"
"아니요, 저 학생이에요."
"아, 학생이시구나. 죄송해요."
"괜찮아요. 얼굴이 학생 같지는 않죠? 나이 많은 학생이라. 직장생활을 잠깐 했었는데, 영혼을 갉아먹는 느낌이 들어서 다시 공부 시작했어요."
"아... 영혼을 갉아먹는..."
"장난이에요. 웃으시라고 하는 이야기예요."
"공감해요. 그 이야기. 공부하는 거 부럽네요. 좋을 것 같아요."
"네. 재미있어요."
낯선 사람과 같은 우산을 쓰는 일은 그렇게 편하지만은 않구나. 말을 걸기도, 가만 있기도 어색하네. 니트 한 장 걸친 내가 추워 보였는지, 그는 다시 내게 말을 붙인다.
"날씨가 꽤 춥죠? 안 추우세요?"
"네, 전 괜찮아요. 내일은 더 춥대요. 옷 따뜻하게 입고 다니세요."
"전 따뜻하게 입고 왔어요. 몇 겹이나 껴입었는데, 외투도 캐시미어라. 지하철 타고 오면서 등에 땀까지 났는걸요."
외투에 손을 대며 해맑게 웃는 그의 모습이 따뜻하다.
"그런데 정말 친절하시네요. 처음 보는 사람 우산 씌워주는 거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저도 처음이에요. 그냥 오늘은 좋은 일 한번 해보고 싶어서요."
"네, 덕분에 비 안 맞고 왔네요. 감사합니다."
이 남자 끝까지 매너가 좋다. 집까지는 아니고 건물 근처까지만 씌워주겠단다.
"다 왔어요. 그런데 장례식장은 어디예요?"
"아, 역 근처예요."
"그럼 저 때문에 일부러 여기까지 걸어오신 거예요? 어떻게 해요. 죄송해요."
"아니에요. 금방 가요."
"......"
돌아서 가는 그를 미안한 표정으로 바라봤더니, 그는 발을 떼지 못하다가 말한다.
"저 가요"
"네, 잘가세요."
미안한 마음, 고마운 마음 두 가지가 교차한다.
돌아서는 그의 모습에 한 동안 얼떨떨했다.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생기는구나. 보통 영화에선 이렇게 사랑이 시작되던데, 우리는 서로 연락처를 묻거나 받지 않았다. 그래서 더 이밤이 아름다웠는지도.
7분,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소소한 이야기를 나눴다. 여자에게 이 시간은 오랫동안 달달함으로 기억될 것같다. 비오는 밤은 어쩐지, 어딘가에 로맨스가 꼭꼭 숨겨져 있을 것만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