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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효정 Dec 01. 2024

단톡방




쓸데없이 감정을 낭비하는 일에 효수는 지쳐있었다. 언젠가부터 사람들과의 대화가 유쾌하지 않았다. 때로는 누군가와 소통하는 방식이 잘못된 건가 싶기도 했다. 지방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수도권에 정착한 탓에 학교 친구들과는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되었다. 그나마 가까이 있던 친구들 조차 어울리기 부담스러웠다. 결혼이 늦었던 탓에 일찍 결혼한 친구들과 공감대를 갖기가 쉽지 않아서였다. 점점 사이가 멀어졌고, 직장에서 만난 사람들을 친구라 생각하며 지냈다. 오랫동안 해왔던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나서는 사랑니가 빠진 것처럼 허전했다. 이렇다 할 인간관계도 없이, 퇴근 후 돌아온 남편과의 대화가 전부인 날도 있었다. 피곤한 남편과의 대화는 쉽지 않았다. 이야기가 하고 싶은 날에는 홈쇼핑을 봤다. 또래의 여자들이 나와서 물건을 파는데, 1~2시간 끌어가야 하는 방송에서 그들은 쉴 새 없이 말을 했다. 상품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도, 가끔 그들의 친구나 남편, 자식 이야기를 늘어놓기도 했다. 서비스업의 특성상 늘 밝은 모습으로 말을 재미있게 했다. 가끔 실수하는 모습은 인간미가 느껴지기도 했다. 이것이 라이브 방송의 묘미. TV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친구와 수다를 떠는 기분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 일을 하면서도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분명 일을 하고 있는데 놈팡이, 백수처럼 느껴지는 날이 많았다. 일은 들쑥날쑥했고, 미래는 보장되지 않았다. 언젠가는 일이 끊길 것에 대한 불안감도 생겼다. 일이 많으면 많은 대로 피곤했고, 없으면 없는 대로 걱정이 많았다.



하영이는 아이가 둘이었다. 남편의 월급에만 의지하기에는 매달 생활비가 마이너스였다. 아이들이 너무 어릴 땐 육아에 집중했지만, 어느 정도 자라고 나서는 시간이 생겼다. 경력단절이라 결혼전 하던 학원 강사일을 하기가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파트타임은 자리도 나지 않았다. 딸아이 유치원 하원할 시간에 맞춰 끝나는 일을 찾다가 간호조무사를 해보기로 했다. 집 앞 안과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할 간호조무사를 찾고 있었다. 월급은 작았지만, 일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처음엔 일을 배우면서 병원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신입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간호사들은 모두 자신보다 어렸고, 팀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참을 수 있었던 건 아이들 때문이었다. 출근해서 일을 할 때면 자신이 바보가 된 것처럼 무기력해졌다. 우울증이 생겼다. 그렇다고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파트타임이라 월급은 턱없이 적었지만, 그마저도 없다면 더 큰 균열이 올 것 같았다. 속상한 마음을 챙길 때가 아니었다. 풀타임 근무가 아니다 보니, 직원들과 알 수 없는 거리감이 생겼다. 간호조무사 일은 생각보다 감정노동이 심했다. 일에 보람을 느낄 새도 없이 간호사들 뒤치다꺼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출근하기 싫은 날이 지속되고,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그녀는 언제든지 타오를 수 있는 깡마른 장작이었다. 누구라도 건드리면 활활 태워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려하던 일은 결국 벌어졌다. 팀장의 말 한마디가 불씨가 되었다. 부당한 요구가 이어지자 더는 이 생활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녀는 퇴사를 결심했다.



혜나는 결혼에 한 번 실패를 하고, 진정한 사랑을 찾았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자신만의 기준으로 평생 함께 할 사람을 찾았다. 그렇게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 둘은 한국을 떠났다. 서로만 있다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캐나다에 정착하고 싶었던 그들은 영주권을 얻기 위해 집을 구하고, 일자리를 찾았다. 한 달에 150만 원이 넘는 월세를 내는 일이 부담스러웠지만, 벌이는 한국보다 나았다.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받는 보수는 꽤 좋았다. 주급제라는 것도 생활에 활력을 줬다. 두 사람의 목표는 돈을 벌어서 자신들의 이름을 건 일식당을 내는 일이었다. 남편은 한국에 있을 때부터 일식집에서 일했던 경력이 있었다. 미래를 계획하는 일에 아이는 없었다. 아이를 낳아 키운다는 것은 사치였다. 캐나다에서 몇몇 친하게 지내는 한국인 부부 외에는 혜나도 친구가 없었다. 부모님도 두 손 두 발 다 들게 한 그녀의 선택이었지만, 가끔은 자신의 판단을 의심하기도 했다. 최고의 친구였던 남편은 가끔 그녀의 속을 뒤집어 놓기도 했다. 외로울 때도 많았다. 무릎까지 차오르는 새하얀 눈을 걷어차며 새벽에 나와 출근 버스를 기다릴 때는 온몸이 꽁꽁 얼어붙었다. 언제나 내편이었던 엄마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했다.



단톡방의 아침은 세 여자의 인사로 시작된다. '굿모닝' 한 명이 인사를 하면, 다른 사람이 똑같이 굿모닝을 외치고, 마지막 카톡을 확인한 사람도 굿모닝을 쓴다. 그들은 뭔가 조언을 구할 일이 생기거나, 힘들 때 단톡방을 찾았다. 마흔 살이 되고 나서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러나 힘들고 우울한 날에는 어김없이 생각과 감정을 토해냈다. 단톡방이 아니라 쓰레기통 같았다. 그들은 누구라도 그곳을 그런 용도로 생각했다. 분노, 슬픔, 우울, 외로움... 눈치 보지 않고 아무렇게나 감정을 늘어놓고 나면, 한결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누가 듣거나 위로해 주지 않아도, 감정을 터 놓는 것만으로도 편안해지곤 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야기를 하고 나면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만 참을걸 왜 이야기를 꺼내 또다시 후회하는 걸까. 어리석다는 생각이 자꾸만 맴돌았다. 그렇게 감정을 드러내는 일도 줄었다. 온전한 이해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완전한 차단이 싫어서였다. 어느 하나 숨 쉴 곳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톡방이라 해봐야 겨우 여자 셋이 하루 일상을 이야기하는 그런 소소한 공간이었다. 서로 처한 상황이 다르고, 입장의 차이가 있다 보니, 가끔은 기분이 상하는 일도 생겼다. 특히 용기 내서 힘겨웠던 이야기를 꺼냈는데 '읽씹'을 당할 때면 단톡방이 왜 있나 싶기도 했다. 가끔은 단톡방을 탈출하고 싶었다. 한 명이 단톡방을 나가는 상황이 벌어지면, 누군가는 다시 그녀를 초대했다. 대충 왜 나갔는지 알고 있었지만, 왜 나갔느냐고 되물었다. 그래야 더 세심하게 신경 써주는 것 같으니까. 그들은 이런 일이 발생할 때마다 '제발 단톡방 나가지 말아 줘'라고 말하며 서로를 초대했다. 



단톡방은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올가미 같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싫으면서도 완전히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인생은 언제나 힘들고 슬픈 일 투성이고, 감정을 쏟아낼 수 있는 공간은 많지 않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잃어버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애증의 단톡방이지만, 이만큼 서로를 이해하는 공간도 없을 것이다. 서로를 지켜야 한다. 그녀들은 이 단톡방이 쭈그렁 할머니가 될 때까지 유지되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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