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워주라... 니가.
결혼에 대한 환상 자체가 없는 내게 누군가 묻는다.
그래도 결혼은 해야하지 않겠니?
나의 대답은 늘 단 한가지였다.
넓은 주방을 가질 수 있다면요.
이 말에는 몇 가지 의미가 담겨 있지만, '안정적인 삶'이라는 의미가 가장 명확했다. 나의 타지 생활은 외롭고, 불안하고 불안정했다.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은 뛰어야 하고, 조금만 꾀를 부리면 몇 걸음이나 뒤쳐져 자신을 타박하고 있었다.
'여행같은 인생을 살고 있다'는 말을 자주한다. 여행은 달리 생각하면 '현실도피'다. 어쩌면 난... 특별할 것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싫어서 도망을 쳤을지도. 삶이 무료해서 견딜 수 없었으므로 그냥 적당히 돈이나 벌다가 시집이나 가는 평범한 삶이 내겐 어울리지 않을 거란 것도 알았었기 때문에. 고향을 떠나 서울살이를 하는 나는 직장에서 돈을 벌거나 좋은 친구, 마음을 나누는 남자를 만나도 늘 불안했다.
언제나 돌아서면 나는 혼자였고, 어딘가에도 속할 수 없는 그런 존재였다. 타지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그렇다. 이런 내가 결혼을 한다고 해서 달라질까? 불같은 사랑은 언젠가 식을테고, 그 불같은 시절에도 마음 한 구석엔 허전함이 남아 있었는데. 식어버리면 얼마나 또 아픈 가슴을 쓸어 내려야 할까... 그래도 결혼이란걸 하게 된다면 지금보단 풍성하고, 채워진 나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가족.
따뜻하고 안락한 울타리.
나는 지쳤고, 편히 쉴 곳이 필요했다.
정착할 수 없는 여행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누군가에겐 그런 안식처가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것일지도.
잠도 오지 않는 이 밤. 누군가의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펑펑울 수 있게 된다면, 나는 와르르 무너져 내려 버리겠지. 그 사람이 너무 좋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