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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했던 좋은 기억 하나

제이(J)

by 김효정

나의 끈질긴 질문에 적잖게 당황했을 J는 갑자기 정자세로 몸을 꼿꼿하게 세우더니 내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집에 혼자 있는 날 보고 누나들이 난리도 아니었어. 같이 살자고. 어머니,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내가 굳이 두 분도 안 계신 집에 있을 이유가 없었거든.”

광주에서 20년을 넘게 살던 그가 서울에 정착하게 된 것은 두 분을 먼 곳으로 보낸 까닭이었다. 나는 한참 동안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듣게 되는구나. 그것도 처음 만난 날.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호프집에서.

“나도 아버지 안 계셔. 고등학교 때 돌아가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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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친해지기 전까지는 집안사에 대해 잘 털어놓지 않는 나였지만, 왜 그랬는지 모르게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조금이나마 그에 대한 미안함을 덜어내고 싶었을까. 아니면, 이토록이나 착한 눈을 가지고 있는 그에게 빠져, 깊은 마음속 이야기까지 하고 싶었을 만큼 정신을 못 차렸던 걸까. 여자는 비비고 기댈 언덕이다 싶은 남자를 만나면 본능적으로 이것저것 다 털어놓는다고 하는데, 과연 이 남자에게 그런 감정이 생긴 걸까.

“그거 알아? 어머니, 아버지 가시고 나서 정말 많이 울었거든. 아버지는 잘 모르겠는데, 유독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나.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왈칵 쏟아져 흐르는 데 어찌할 도리를 모르겠더라. 그럴 때마다 함께 시간을 보내드리지 못한 게 후회돼.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더 많은 시간을 어머니와 보낼 거야.”

그의 말에 가슴 한쪽이 가느다랗게 떨려왔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지 조금은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만히 팔을 뻗어 머리를 만져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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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둘은 다 결혼했어. 큰 누나는 매형이 미국에서 대학교수를 하고 있어서 미국에서 살고 있고, 작은 누나는 서울에서 살아. 집 근처에 있어서 자주 만나서 식사도 하고 조카들하고 놀아주기도 하고.”

“그래도 챙겨주는 누나가 있어서 좋겠다.”

“누나들은 별일 없어도 전화하고 카톡 하고 그래. 근데 내가 답을 잘 안 하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그는 누나의 카톡 프로필에서 조카 사진을 찾아 보여준다. 초롱초롱 예쁜 눈이 꼭 그를 닮았다.

“예쁘다, 오빠랑 닮았다. 누나와 나눈 대화 봐도 돼?”

‘얼른 결혼해서 너도 가정을 꾸려야지. 더 늦어지면 안 좋아. 그럼 사람 만나기 더 어려워진다.’ 역시나 결혼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어쩌면 그에게 큰누나는 어머니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누나가 남동생 걱정 많이 하네.”

“내가 못나서 그렇지 뭐. 친구들도 거의 다 결혼하고 누나는 혼자 지내는 내가 신경 쓰일 수밖에.”

“나도 요즘 주위에서 부쩍 결혼 안 하느냐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스트레스야. 사람을 만나는 자체가 쉽지 않은 일 같아. 나에 대해 구구절절하게 설명을 늘어놓는 것도 솔직히 피곤하고 싫어. 그래서 소개팅도 나랑은 안 맞는 것 같아. 두어 번 만나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이 돼? 어떤 남자는 만나자마자 자신의 경제적 능력부터 어필하더라. 연봉이나 집, 그리고 노후 자금, 부모님 직업까지. 그리고 두 번째 만났을 때 사귀자고 하더라고.”

“그 사람은 소개팅이 아니라, 선자리라 생각했던 모양이네. 처음 만남에서 그런 이야기 잘 안 하는 데. 네가 좋은 사람이면 꼭 좋은 사람 만나게 되어 있어.”


좋은 사람은, 언젠가는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의 이야기가 가슴 한구석에 애잔하게 박혔다. 아마도 이 말은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마치 그는 내게 좋은 사람이라고 그러니, 행복하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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