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쉽게 사용하는 말 중에 “이상한 사람이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상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순간, 상대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되어버리고, 상대가 이상한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가장 손쉽게 문제에 접근하는 태도입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만날 때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학생에게 드러나는 문제들을 설명하기 위해 어른들이 노력합니다. 예를 들어 가족 구조나 형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가장 흔합니다. “집에 이런 문제가 있다네요.”라고 말하는 식입니다.
이 시기가 지나, 긴 시간 만성화된 어려움을 보이는 학생을 지속적으로 상대하다 보면, 동료 교사들은 점차 지쳐갑니다. 물론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어떤 학생은 교사나 어른에게 적대적이고 교묘하며, 통제하기도 어렵습니다. 지도상에 큰 어려움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이제 그 학생을 두고 어른들은 “걔 원래 좀 이상한 아이야.”라고 말하게 됩니다.
이러한 태도는 학생을 마치 ‘순수한 악’으로 바라보거나, 원래부터 ‘이상한 학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에, 왜 그런 어려움이 발생했는지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만듭니다. 우리가 극악무도한 범죄자가 나타났을 때 ‘사이코패스’라는 단어로 분류되면, 다른 어떠한 설명도 필요 없어지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손쉽게 상대를 끌어내리는 방식이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악하거나 이상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상하다’는 기준 또한 시대나 사회적 보편성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화합니다.
어른에게 적대적이거나 문제행동을 많이 보이는 학생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동기에 대해 좀 더 이해하고 공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학생은 나름대로 십수 년을 살아오며 생존에 필요한 자신만의 기술을 터득해 온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어른, 즉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불신과 학대, 정서적인 단절을 경험한 학생이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이 학생은 어른을 믿지 않고, 오히려 의심하고 적대적으로 대하는 것이 자신의 생존에 더 유리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와 같은 사례에서, 학생이 변화할 수 있는 계기 또한 자신을 믿어주는 신뢰할 수 있는 어른을 만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아이들은 변화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어른들보다는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