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테 소중한 걸 왜 너는 막 다뤄?

by 김지은이

아이패드를 샀다. 이리저리 치이며 일당을 벌고 퇴근하던 길 버스 안에서 ‘시발, 내가 이렇게 개같이 벌고 이거 하나도 못 사? 살거야, 살거라고.’

살벌하게 중얼거리며 목적지를 바꿔 아이패드를 실물로 만져봤던 매장으로 향했다. 24개월 무이자 할부로 구매하고 다시 집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막막한 행복함을 느꼈다. 곱고 매끈한 패드와 펜슬을 보며 그 날은 밤새 아이패드 사용법, 필수 어플 등을 검색하다 화면을 켜 둔 채 잠이 들었다.



“지은아… 해피가 니꺼를 물어뜯어놨는데…”

어느 날 저녁 집으로 들어서는 날 보며 엄마가 불안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나도 같이 불안해져 가방만 내려놓고 물어 뜯은 게 뭔지 확인했다. 애플펜슬이었다. 나는 순간 해피도 엄마도 모두 너무 미워져 소리소리를 지르며 엉엉 울었다. 대체 다들 나한테 왜 이러느냐고 울부짖었다. 엄마는 아무 말 하지 않았고 해피는 덜덜 떨며 구석으로 숨어들어갔다. 울음을 그치자 이번엔 입을 꾹 다문 화가 찾아왔고 나는 무시무시한 어둠을 내뿜으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해피가 살금살금 다가오는 발걸음이 느껴졌지만 모른척했다.


한숨 자고 일어나니 펜슬이 정말 망가졌는지 이성적으로 확인해 볼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앞촉과 뒷부분 모두 속의 내용물이 보일만큼 물어뜯어놨고 필기가 되지 않았다. 펜촉은 교체가 가능하다고 했으니 매장으로 가서 테스트를 요청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곤 해피에게 다가갔다. 해피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나를 반겨주었다.

해피를 끌어안고 계속 미안하다고 말했다. 쓰다듬어 주었다. 해피는 내 팔을 핥아주다가 반짝거리는 눈을 내 눈에 맞추었다. 그 눈 속에 담긴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런데 해피에게 나 말고 또 소중한 게 있을까? 나는 소중한 걸 이렇게나 방 안에 잔뜩 들여두고도 또 새로운 걸 찾고 있는데 말이다. 이거 참 해피에게 치사한 관계가 아닐 수 없다.


해피가 우리 집에 온 후 며칠 뒤 엄마가 또 집을 나갔었다. 엄마가 전화를 받지 않아 불안했던 나는 회식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 택시를 타고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왔다. 불이 다 꺼진 방 안에서 아직 제게 익숙한 공간 한 뼘을 찾지 못한 해피는 어정쩡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숨을 헐떡이며 들어서는 나를 보고는 왜인지 안심한 것 같았다. 해가 저물어가고 어둠이 찾아오던, 아무도 없는 낯선 공간에서의 그 시간이 해피에겐 얼마나 긴 시간이었을까. 바로 며칠 전만 해도 엄마아빠랑 같이 따뜻한 집에서 지냈었는데. 나 같으면 그런 시간을 두고두고 원망했을지도 모르겠는데 해피는 바보같이 원망은 할 줄 모르고 제 마음을 온전히 다 나에게 주었다.


그랬는데 고작 그 펜 하나가 뭐라고, 대체 그게 뭐라고.



내가 사 둔 물건들이 내가 건드리지 않는 한 절대 움직일 일이 없는 집에 들어서던 때는 뒤치닥꺼리 할 게 없어 편안했지만 온기가 부족했다.

밖에서부터 가져온 슬픔이 녹아내릴 곳을 찾지 못하면 종종 컴컴한 현관에 그대로 주저앉아 흐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이젠 집에 들어서면 무조건 달려와 반겨주는 해피가 있기 때문에, 무뚝뚝하게 인사를 건네는 엄마가 있기 때문에 문을 열기 전부터 웃을 수 있다.

그런 존재들에게 내가 무슨 짓을 한거야?

엄마랑 해피는 집에서만 지내잖아. 엄마는 나랑 병원에 갈 때, 해피는 나랑 산책 갈 때 밖에 나가는 정도가 거의 전부인데, 그럼 둘에게는 내가 세계일 수도 있지 않을까?

불안정하고 때때로 폭발하는 세계를 지켜보는 심정은 얼마나 불안할까?

그런데 정말 내가 둘의 세계이면 어떡하지?

이렇게나 얕고 좁은 내가 그렇게 큰 의미이면 어떻게 해야 하지?

정말로 그렇다면 나는 더 따뜻하고 넓은 세계가 되고 싶다.


그들은 종종 내게 부담스러운 존재들이었다.

내가 책임져야 하고 챙겨야 하니까 말이다.

나 혼자만 먹고 살 수 있다면 지금보다 훨씬 여유로울텐데 하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되려 어떤 것들을 받고 있나 곰곰히 떠올리다 더 따뜻하고 넓은 세계라는 기특한 생각까지 오게 되었으니

해피와 엄마는, 엄마와 해피는 나를 계속해서 발전시켜주는 존재들인거구나.

내가 화를 내면 조금 멀어졌다가도 내가 사과하면 기꺼이 받아주는,

나를 계속해서 견뎌주고 기다려주는 존재들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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