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과 은

by 김지은이

영과 은은 앙숙이었다.

은이 영보다 키가 큰 어릴 시절엔 몸싸움도 곧잘 했지만 영도 남자는 남자인지라 곧 은의 체격을 훌쩍 뛰어넘었고 그 뒤론 주로 말싸움을 했다.

그렇게 많이 싸웠어도 은에게 영은 자신의 뒤를 졸졸 따라 다니던 귀여운 동생의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영은 군대에 가기 직전 며칠 동안 아주 깊게 어두워진 모습을 보였다. 방문을 열면 빈 소주병과 컵라면 그릇이 뒹굴었고 불은 항상 꺼져 있었다.

마치 생의 마지막 며칠을 보내는 듯 했던 영은 그렇게 군대에 갔고 영이 입고 갔던 옷만 박스에 담긴 채 되돌아왔을 때 은은 생애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먹먹함에 한참을 박스 앞에 앉아 있었다.


영은 겉으로 보기엔 무사히 제대를 했지만 어딘가 다른 사람처럼 변해 있었다.

말투가 난폭해졌고 빨갱이니 북괴니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영을 은은 이해하기 어려웠고 때론 무섭게 느껴졌다.

군대에서 지내는 동안 어떤 일들을 경험했는지 궁금했지만 영은 그에 대해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얼굴만 마주하면 으르렁대던 둘은 차라리 말을 섞지 않기 시작했고 같이 살던 집 계약이 만료돼 각자 살기로 했을 때까지도 관계는 영 소원했다.


억지로라도 얼굴을 마주할 기회가 없는 데다 안부문자 한 통도 건네지 않고 살던 때에 은은 가족도 별 거 없구나. 이대로 남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아주 끊어질 것 같던 그들의 관계를 다시 이어준 것은 오랜 시간 연락이 되지 않던 그들의 엄마였다.

영과 은은 엄마의 치료와 거취문제를 두고 자주 얘기를 나눴다.

영의 거친 말투 속에서 인간의 도리에 대한 고민이 비칠 때면 은은 안도감을 느꼈다.




“너 바보냐?”

은이 금전적인 손해를 감수하는, 하지만 마음은 더 편해질 것 같은 선택을 할 때면 영에게 들었던 말이었다.

은은 어떤 면에선 제법 황소고집 기질이 있어 영과 의견이 충돌할 때면 자신의 생각을 밀어 붙였고 영이 번번이 백기를 들곤 했다.

그리고 그건 은이 혼자 손해를 감당했기에 가능했다.


영은 은에게 현실감각 좀 가지라는 말도 자주 했다.

다같이 죽기 싫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이다.

영이 말하는 현실감각이라는 건 무엇보다도 자신의 안위만을 최우선 순위에 두는 것이었다.

영도 은만큼이나 자신의 삶에 제대로 집중해 볼 수 없었던 주변 환경이 원망스러운 듯 했다.


"야 이거 봐라."

오래 전 영은 학교신문을 슬쩍 내밀더니 거기 조그맣게 인쇄된 자신의 이름을 가리켰다. 내가 깜짝 놀라며 이거 뭐냐고 묻자 엷은 미소를 띄우고는 별 거 아니라며 신문을 치우려 했다. 뺏어서 살펴보니 교내 문학상 수상자 명단이었다.

은은 한 번씩 그 때 영의 모습을 떠올렸다.


은도 언제나 일관되게 자신의 생각을 유지하지는 못했다.

상황이 더 힘겨워질 때마다 영의 말을 들었어야 했나, 역시 내가 틀렸나 후회에 후회를 거듭하던 시간들이 자주 찾아왔다.


“야, 나 죽으면 상속포기 신청해라. 그럼 내 빚 안 갚아도 된다.”

무표정한 얼굴로 영이 말했을 때 은은 복합적인 감정을 느꼈다.

자신 역시도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하던 시기였다.

영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 않음을 느낀 것 같았고 은은 그런 영에게 마치 드라마처럼 통장 하나 떡 쥐어주고 좀 쉬라고 할 수 없는게 속상했다.


때론 다른 무엇도 아닌 곁에 있는 누군가의 성취가 그를 일으켜세운다는 생각을 했다.
복자에게 - 김금희


그들의 엄마가 다시 현실에서 도망쳐 버렸을 때

은은 한동안 일을 할 때 말고는 침대에서 벗어나질 않았다.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 동안 며칠 머무르기 위해 들른 영도 마찬가지였다.


마음을 굳게 먹는 것만으로는 돌파구가 보일 것 같지 않은 매일이 계속되던 때에

은은 침대에서 모로 누워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곤 커튼을, 조명을, 패브릭 포스터를, 러그를 주문했다.


방 안이 좀 더 정돈되고 따뜻한 느낌으로 바뀌자 은의 마음에도 새로운 공기가 조금은 들어오는 듯 했다.

숨통이 약간이나마 트이는 느낌에 은은 조금씩 침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은은 대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영의 방문을 열어 괜히 한 번 쓱 쳐다보고 문을 닫곤 했다.

그렇게 삶의 의욕에 어떻게든 다시 불을 지펴보자 하고 있을 때 엄마를 다시 찾았다.

엄마를 위해 재차 의기투합을 해야 했던 영과 은은 엄마의 상태가 나아지는 것을 보며 조금씩 삶의 의욕을 되찾는 듯 했다.




“가긴 어딜 가냐, 여기가 내 본가인데.”

얼굴에 조금씩 웃음기가 돌기 시작한 영이 어느 날 말했다.

그 말에 은은 어렸을 적부터 내겐 본가가 따로 없다는 사실에 종종 서러워했던 마음이 떠올랐다.

난 데 없는, 갈 곳 없는 느낌은 마치 우주미아가 된 듯 외로움에 잠기게 했다.


그리 넓고 좋은 집도 아니지만은 자신이 조금이나마 신경을 쓰고 꾸민 공간이 누군가에게 본가가 될 수도 있다는 건

은이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본가라는거 내가 만드는 것도 괜찮겠구나.


영에게 좋아하는 색이 뭔지 물었다.

하늘, 분홍이라고 했다.

딸기우윳빛 커튼을 주문해 영의 방 창문에 달았다.

간이서랍을 주문해 쇼핑백에 대충 우겨진 영의 옷가지들을 정리했다.

1~2달에 한 번쯤 방문하는 영의 방은 다소 어수선하게 정돈이 덜 된 공간이었다.


영이 오기로 한 날, 언제쯤 도착해서 변한 자기 방을 볼까 은은 조바심이 났다.

“야! 니 방 바뀐거 어떠냐!”

일을 마치고 온 은이 들뜬 목소리로 방문을 벌컥 열며 물었다.

“뭐 나쁘지 않네.”



은이 금전적인 손해를 감수하는 대신 조금 더 마음이 편한 선택들을 했었다는 건 어쩌면 욕심이 없는 사람으로 비춰지는 일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은은 자신의 삶이 아주 조금씩이나마 옳으면서도 밝은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것을 느꼈을 때 그런 생각을 했다.

자신은 잘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버린 적이 없었다고 말이다.

어릴 적 장래희망 칸에 현실적 조건들은 일체 생각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그대로 적었듯이

은은 지금의 조건이야 어쨌든 자신의 꿈은 이것이라고 마음 속에 진하게 새겨본다.

[나는 마음 편하게 잘 살고 싶은 욕심이 있다. 나는 이 큰 욕심을 더 키워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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