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여자는 약한 존재라서 보호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결혼이라는 제도만큼은 여자에게 불합리하다고 느낀다.
물론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에는 반박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남녀 갈라치기를 위한 글은 아니니 “생각이 다르구나” 하고 봐주면 좋겠다.
나는 지금까지 세 번의 유산을 했다.
그중 억울하고 서러웠던 것은 두 번째 유산이었다.
주말 부부였던 나는 그 고통을 홀로 견뎌야 했다.
임신 테스트기에 두 줄이 나타났을 때, 나는 기쁨에 몸이 들썩였다.
병원을 찾았지만, 아직 임신낭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제발 너무 빨리 검사해서 그런 것이길 바랐다.
임신 테스트기에서 두 줄을 본 직후, 나는 과거 큰 교통사고를 떠올렸다.
몸이 좋지 않아 엑스레이와 CT까지 찍었던 기억이 마음을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병원 방문 후에도 중간중간 복통이 찾아왔다.
집에서 쉬고 싶었지만, 남편의 둘째 동생 피로연이 있어 가족들은 무조건 참석하길 권했다.
피로연 당일, 남편은 삼형제 중 장남이었다. 막내는 바쁘다는 이유로 오지 않았다.
화도 났고 섭섭한 마음이 교차했다. 어머니 역시 내 임신 소식을 알고 있음에도 참석을 권했기 때문이다.
식당은 피로연 전용 공간이 아니었다. 시골 작은 횟집, 식탁 카운터 방바닥에 앉아 축의금을 받았다.
복통이 심해 화장실에 들렀을 때, 피가 나오기 시작했다. 불안감이 몰려왔고, 집에 가서 쉬고 싶었지만 어머니는 정산을 해야 한다며 본인 집에 가 있으라고 했다. 결국 나는 주말 내내 누워 있어야 했다.
다음날 출근 중에도 복통이 찾아왔다. 병원에 도착했지만 대기는 1시간을 넘겼고 다른 병원으로 옮겨야 했다. 의사는 자궁외 임신 가능성을 언급했다.
임신 초기부터 임신낭이 보이지 않았던 병원이라 확진은 어렵지만,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나팔관이 터질 수 있다는 말은 서늘하게 다가왔다. 타지에 홀로 있는 상황에서 입원을 결정했다.
그 주 주말 둘째 동생 결혼식이 있었지만 나는 갈 수 없었지만 남편은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 건강을 묻기보다 “남편이 결혼식 가야 하니 너에게는 못 보낸다”라고 말했다.
말로는 “우리 큰딸”이라 하면서도, 실제 나는 남보다 못한 존재로 느껴졌다.
예전에도 어머니는 그랬다. 본인이 필요할 때만 나는 ‘딸’이었고, 평소에는 ‘자네’였다.
결혼식 이후 남편은 나를 챙기러 오지 않았다. 사실 오지 말고 집에서 쉬라고 한 내 탓도 있었지만, 마음 한켠은 서운했다.
어머니는 모든 것이 자기 위주다. 예전엔 그냥저냥 맞춰가며 살았고, 이 사건 이후에도 살뜰히 챙기며 지냈다.
요즘엔 생각한다. 이게 맞는 걸까. 맞는 건가.
이제 나는 결심했다. 나를 먼저 챙기고, 나의 몸과 마음을 소중히 여기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