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나는 남부러울 것 없이 컸다. 그땐 우리 집이 엄청난 부자는 아니었어도 중산층 정도는 됐다.
엄마는 비싸고 좋은 옷만 입혔다. 용돈을 달라면 언제든 줬고, 인형이 갖고 싶다고 말하면 인형을 사주고 컴퓨터를 갖고 싶다고 하면 컴퓨터를 사주셨다.
단 한 번도 "안돼. 참아"라는 말 한마디 한적 없었다. 그렇게 남부러울 것 없이 컸다.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엄마의 엄청난 희생이 있어 아쉬울 것 없이 잘 살고 있었다는 것을 그땐 몰랐다.
엄마는 힘이 있는 사람이었다. 커가면서 깨닫게 됐다. 우리 엄마가 나를 지키기 위해 버텨내고 힘을 기르며 살았다는 것을 말이다. 홀로 돈을 벌고 가사도 책임지며 무거운 짐을 감내해야 했다.
그에 비해 아버지는 직장 이직이 잦았다. 회사를 자주 옮겨 다녔다. 한 곳에 정착을 못했다. 늘 하고 싶은 걸 갖고 싶은 걸 가졌다. 연극이 하고 싶다며 한동안 연극에 빠져 살았다. 돈을 벌어온 일도 드물었다. 그야말로 한량인 셈이다.
사고도 많이 쳤다. 내 어릴 적 기억만 보아도 아버지는 사고 대장이었다. 사회에서 알게 된 동생과 사업을 한다며 대출을 받아 회사를 차렸다. 사기였다. 대출을 받아 차를 사고 사무실을 리모델링하며 들었던 빚은 아버지가 아닌 엄마 몫이 됐다. 아버지는 집을 잘 나갔다. 엄마와 싸우면 나갔고 몇 달째 돌아오지 않았다. 가출기간은 한 달이 됐다. 육 개월, 1년 등 점점 늘었다. 그 사이 밖에서 또 사고를 쳤다. 결국 아버지와 엄마는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이혼했다.
난 아버지가 싫다. 여전히 용서를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아버지라는 어두운 그늘이 있다.
우연히 화목한 부자와 부녀지간의 모습을 보면 왈칵 눈물부터 난다. 아이러니하게도 말이다.
불행은 연거푸 온다고 했다. 엄마와 아빠가 이혼할 때쯤 집안에 빨간딱지가 붙었다. 내가 어린 시절부터 즐겨 쳤던 피아노 침대 컴퓨터 어느 것 하나 없이 빨간딱지가 붙어있었다. 나는 그 딱지를 보고 아주 많이 놀랐다.
지금에서야 돌이켜 보면 모든 것을 홀로 감내하던 엄마가 무너진 것이다. 어쩌면 이만큼 버텨왔던 엄마가 대견스러운 거다. 엄마는 낡고 오래된 임대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엄마는 나에게 타지로 대학에 가기는 것이 오히려 잘됐다고 했다.
집 환경은 많이 달라졌다. 오래된 낡은 아파트. 크고 넓은 고층아파트를 살았을 때와 환경이 달랐다. 그곳에서는 쥐도 나왔다.
그렇게 엄마는 버텨낼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대학 4학년 엄마는 무너졌다.
임대 월세가 밀린 탓에 거리로 내몰린 것이다. 아파트 관계자는 야속하게도 집안에 짐을 모조리 빼 이삿짐센터로 보냈다. 엄마는 힘을 잃고 넉 타운 상태가 됐다.
돌이켜보면 나 또한 하고 싶은 일을 했다. 돈을 벌기보다 까먹었다. 나는 지역의 한 신문사에서 기자를 하며 하고 싶은 일을 했다. 돈벌이가 되지 않은 일. 사명감 하나로만 일을 했다. 좀 돈을 버는 일을 했으면 어땟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선 '힘'이 필요하다. 엄마 '힘'은 '희생'에서 나왔다. 엄마 또한 하고 싶은 일이 많았을 터. 그 일을 다 하지 못했다. 놓고 살았다. 그저 나하나 잘 키우자는 명목하에 모든 걸 내걸었다. 모든 부모가 그렇듯 내 자식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결혼을 하고 나서야 아주 늦게 든 생각이 하나 있다. 누군갈 지키기 위해선 '힘'이 있어야 하는 것을 생각한다. '힘'을 기르고 싶어졌다. 아주 강한 '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