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꽉 채웠는데, 남은 건 없었습니다

21회 시간은 흘렀지만, 나는 없었다

by 베풂과 행복

21일 차. 하루를 꽉 채웠는데, 남은 건 없었습니다


퇴임 후 회사 밖에서의 하루는 너무 빨리 흘러갑니다.
특별히 대단한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하루는 어김없이 끝나 있습니다.
잠깐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 날은 금방 어두워집니다.

그래서 선배들은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 알아보았습니다.
내용은 대부분 비슷했습니다.
오전은 관리, 오후는 관계, 저녁은 정리였습니다.


오전에는 운동과 명상, 독서, 시장 동향과 가벼운 뉴스 확인.
오후에는 점심 모임이나 사회공헌, 개인 프로젝트, 운동.
저녁에는 가족·친구·지인들과의 식사, 문화활동, 그리고 하루 정리.
하루를 허투루 보내지 않기 위한 나름의 질서가 보였습니다.


그때는 흘려들었던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지금은, 제가 그 자리에 와 있었습니다.


A선배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골프 모임에 자주 나가고 있어. 약속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힘들어.
직장에 다닐 때는 가끔 쳐서 재미있었는데,
지금은 일주일에 세네 번씩 치다 보니 재미가 없어졌어.”


B선배님은 새로운 도전을 선택하셨습니다.
“자격증 공부를 하고 있어. 아침 일찍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해.
공부를 하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잡념이 없어져서 좋아.”


C선배님은 아주 다른 하루를 살고 계셨습니다.
“아침에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두 시간 정도 동네를 산책해.
집에 와서 빨래를 꺼내 정리하는데, 수건은 꼭 칼같이 접어 놔.
가족들이 그걸 그렇게 좋아하더라.”


새로운 직장을 구한 분도 있었고,
방송통신대학교나 대학원에 다니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선배님들의 하루는 각자 나름의 이유와 질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제가 따라야 할 정답은 아니었습니다.


하루를 가만히 있지 않고 무엇인가를 많이 했는데도,
이상하게 아무것도 남지 않은 날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시간은 분명 지나갔는데,
그 시간 안에 제가 없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을 잘 보내는 법보다,
하루를 꽉 채우고 난 뒤에도
무엇이 남는지를 고민하고 싶어 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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